서울 
수원 
)
수나라가 남방을 통일한 후 문제는 혼란스럽고 어수선한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불교를 적극 장려했다. 전국에 은둔한 고승을 도성으로 불러 모으고 대흥선사를 중심으로 불법을 펼치는 일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전장에서의 공로로 무위장군이 되어 문제를 가까이 모시게 된 하약필은 원광을 잊지 않고 추천했다. 수 문제도 남방 원정에서 법사의 명성을 들었기에 흔쾌히 도성으로 불러들이게 했다.
하약필은 심복에게 수레와 많은 예물을 내주며 법사를 모셔 오게 했다. 하지만 그가 호산에 도착했을 때는 원광이 종적을 감춘 후였다. 심복은 소득 없이 도성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보고를 받은 하약필은 매우 낙담했다. 원광의 설법을 통해 도성의 백성에게 깨달음을 주고자 했던 그의 소망이 수포로 돌아간 것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수소문조차도 포기하고 있을 때였다. 원광이 거짓말처럼 하약필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장군은 반가운 나머지 맨발로 뛰어나가 원광을 맞았다.
“얼마나 애타게 찾아 헤맸는지 모릅니다.”
원광은 미소를 띠며 하약필의 손을 잡았다.
“이제 북방에 도를 전할 때가 되었기에 이렇게 장군을 찾아왔습니다.”
두 사람은 밤이 늦도록 지난 일을 얘기하면서 회포를 풀었다.
다음 날 하약필은 원광을 데리고 문제에게 나아갔다. 수 문제는 법사와의 첫 대면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대흥선사에 머물며 백성에게 설법을 베풀게 했다.
원광의 강설은 쉽게 이해되면서도 뇌리에 강렬히 각인됐기에 백성의 많은 호응을 얻었다. 이리하여 법사는 수나라의 도성에서 이름을 드날리게 됐다.
원광이 살아온 이야기를 들은 담육은 깊은 감명을 받았다. 오직 불법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그의 생애와 열정은 자신을 비롯한 모든 신라 승려에게 본보기가 되고도 남았다.
“지금 우리 폐하께서는 불법을 바로 세워 백성을 하나로 모으기를 원하십니다. 그 일을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대사밖에 없습니다. 부디 신라로 돌아오셔서 불국토를 건설하는 일을 맡아 주십시오.”
담육과 얘기를 나누다 보니 원광의 마음에 문득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봄바람처럼 밀려왔다. 원광이 서라벌을 떠난 지도 어언 30여 년이 흘렀다. 청년은 어느새 노인이 되어 있었다.
원광은 담육이 자신을 찾아온 것도 인연이라 생각했다. 이제야 비로소 고국으로 돌아갈 때가 온 것이다.
몇 년 후 진평왕은 나마 제문(諸文)과 대사 횡천(橫川)을 수나라에 보내 원광을 신라로 돌려보내 달라고 정식으로 청했다.
수 문제는 법사를 불러 뜻을 물었다.
“이곳에서 제가 할 일은 끝났습니다. 이제 신라로 돌아가 고국의 중생을 구제하는 일에 여생을 바칠까 합니다.”
문제는 명망 높은 고승을 보내고 싶지 않아 여러 차례 다시 물었다. 하지만 원광이 누차 돌아갈 것을 청하자 어쩔 수 없이 허락했다.
법사는 장안성을 떠나는 신라 사절단과 함께 성문을 나섰다. 하약필·담육 등이 성문 밖까지 따라 나와 전송했다.
하약필의 눈시울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제 가면 다시는 못 뵙겠지요.”
“회자정리(會者定離·만남에는 반드시 헤어짐이 따른다)라 하지 않습니까.”
원광이 담육을 돌아봤다.
“부디 깨달음을 얻기를 바라네.”
담육은 장안에 남아서 불교 경전을 연구하고 있었다. 불교의 묘리를 터득해서 신라 백성에게 널리 알겠다는 것이 그의 포부였다. 원광은 담육이 품고 있는 고귀한 이상이 꼭 실현되기를 기원했다. 그렇게 되면 신라의 불교도 깊이를 더할 수 있었다.
담육은 머리 숙여 합장했다. 이제 위대한 스승을 얻었으니 진평왕의 꿈이 이루어질 날도 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광은 사신단과 함께 바다를 건너 신라로 돌아갔다.
진평왕은 원광을 맞아 국가의 고문으로 예우했다. 국왕은 법사를 황룡사에 머물게 해서 교단을 관장하게 하고, 나라의 대소사를 처리하는 데 있어 일일이 자문했다. 그는 세상을 꿰뚫어 보는 혜안을 가지고 있었기에 나랏일에도 시의적절한 조언을 해 줄 수 있었다.
원광은 황룡사에서 법회를 열고, 백성에게 금과옥조(金科玉條)가 될 가르침을 남겼다. 원광의 설법을 듣고 감복한 사람들은 그를 생불(生佛)로 떠받들었다.
이때, 화랑 김용춘(金龍春) 문하에 사량부 출신의 귀산(貴山)이라는 청년이 있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죽마고우인 추항(帚項)과 함께 학문이 깊고 덕이 높은 사람을 찾아다니며 가르침을 받았다.
귀산과 추항은 용춘의 성품이 온화하고 공손하여 탐욕과 방탕을 멀리한다는 소문을 듣고 사량부를 떠나 도성으로 올라왔다. 용춘을 찾아간 두 사람은 낭도로 받아달라고 간청했다.
용춘은 두 사람의 언행이 정연하고 예의 바른 모습을 보고 기쁜 마음으로 문하에 받아들였다. 귀산은 호기심이 많아 항상 새로운 것을 좇는 데 비해, 추항은 과묵하고 신중하여 경거망동하는 일이 없었다.
용춘은 귀산의 재기 발랄함과 추항의 진중함을 모두 사랑했다. 두 사람은 차츰 낭도들 사이에서 주목받았다. 귀산은 격의 없고 쾌활한 태도로 많은 낭도와 친교를 맺었다. 추항은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자세로 덕을 갖춘 사람들과 어울렸다.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귀산과 추항에게도 원광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오랫동안 벼르던 그들은 드디어 법사를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알아보니 원광은 이미 도성을 떠나 청도의 운문사(雲門寺)에서 동쪽으로 9천 보쯤 떨어진 곳에 자리한 가슬사(加瑟寺)라는 작은 암자에 은거하고 있다 했다.
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어느 날, 귀산과 추항은 화랑의 허락을 받고 행장을 꾸려 가슬사로 향했다. 두 사람은 숨 막힐 듯한 불볕더위를 뚫고 길을 재촉했다.
두 사람이 소나무 숲을 지날 때, 매미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귀산이 옷소매로 땀을 닦으며 추항을 돌아봤다.
“아까 지나는 촌부가 말하기를 저 고개만 넘어가면 작은 암자가 보일 거라 했네.”
고개를 넘자 초막이 나타났다. 귀산은 암자의 초라한 모습을 보고 놀랐다. 천하에 이름 높은 고승이 이런 궁벽한 곳에 산다니 믿기 어려웠다.
귀산이 머뭇거리고 있는 동안 추항이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다가왔다.
이때, 초막의 문이 열리면서 어린 행자가 나왔다.
“어인 일이신지요?”
행자에게서 풀잎 냄새가 풍겨 왔다.
“이곳에 원광 대사님께서 머물고 계시다 들었습니다.”
“스승님께서는 호구암(狐九巖)으로 참선하러 가셨습니다.”
행자의 입가에 여름 바람처럼 시원한 웃음이 번졌다. 적막한 암자에 있다 보니 사람이 그리웠는지 귀산과 추항에게 묻지도 않은 얘기까지 쏟아 놓았다.
행자의 얘기로는 호구암은 여우가 자주 출몰하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지금도 밤만 되면 여우들이 울어대는 통에 무서워서 잠을 잘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런데 대사께서는 어찌 그런 위험한 곳에서 참선하십니까? 자칫 화라도 입으면 어쩌시려고.”
“스승님께서 말씀하시길 인간이 욕심을 버리고 자연에 순응하면 맹수들조차 심상히 여기고 경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호구암에 가려면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시오. 저희가 찾아가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초막에서 골짜기를 빠져나가 산등성이를 타고 오르면 깎아 놓은 듯한 절벽이 나옵니다. 그 정상에 있는 둥글넓적한 바위가 바로 호구암입니다.”
귀산은 툴툴거리는 추항을 재촉해서 호구암을 향해 올라갔다. 산이 높지는 않지만 산세가 험준하고 수풀이 우거져 있어 쉽사리 다가가기 어려웠다.
귀산이 절벽 가까이 이르니 바위 위에 한 스님이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멀리서 봐도 원광법사임을 알 수 있었다. 마침 붉게 물드는 석양 아래서 법사의 몸이 불타오르는 듯했다.
귀산은 넋을 잃고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원광은 풍기는 기상만으로도 사람을 매료시켰다.
뒤따라온 추앙이 어깨에 손을 올리자 귀산은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법사에게 다가갔다.
“스님, 우매한 속인들이 지혜가 없어 올바른 길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라옵건대, 한 말씀 내려 주시면 죽을 때까지 계명으로 삼고 매진하겠습니다.”
가부좌를 튼 자세로 서서히 어둠이 짙어지는 먼 하늘을 바라보던 원광이 천천히 일어나 돌아섰다. 그에게서는 위엄과 온화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법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입술을 살짝 들썩였을 뿐인데도 말소리가 또렷하게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불교에는 보살계(菩薩戒)가 있는데, 10계로 되어 있다. 너희와 같은 범인이 감당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기에 따로 세속(世俗)에서 지켜야 할 5가지 계명(五戒)을 내려 주겠다.”
세 사람은 이때 처음 만난 것이었지만 한눈에 서로를 스승과 제자로 인정하였다. 그런 이유로 가르침을 주고받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귀산과 추항은 엎드려 원광 법사의 계명을 받았다.
“첫째, 충성으로써 임금을 섬겨라. 신하 된 자로서 임금께 충성하는 것은 나라의 기틀을 강건히 하는 것이다.
둘째, 효로써 부모를 섬겨라. 부모가 없으면 너희가 어디에서 생겼겠느냐. 뿌리를 잊어서는 절대 큰일을 이룰 수 없다.
셋째, 친구와 사귐에 신의가 있어야 한다. 너희 두 사람이 비록 다른 날 태어나기는 했지만 서로에게 가장 큰 힘이 돼 줄 수 있다. 서로 믿는 마음이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은 우의를 만든다.
넷째, 싸움에 나가서는 물러서지 마라. 너희가 물러서면 아끼는 사람들이 해를 입는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다섯째, 살생할 때는 가려서 하라. 생명은 무엇이든 소중한 법이니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된다.
너희는 이를 실행하는 데 있어 한 치의 소홀함도 있어서는 안 된다.”
귀산이 마지막 계명에 이의를 제기했다.
“다른 계명은 알겠습니다만, 살생하는 데 가려서 하라는 것은 어떻게 하라는 건지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때를 가려 육재일(六齋日)에는 살생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대상을 가려 말·소·닭·개 등 자기가 부리는 짐승을 죽여서는 안 된다. 고기 한 점도 되지 못하는 작은 생물은 죽여서는 안 된다. 소용되지 않는 것을 함부로 살생하지 마라. 이것이 자연의 법칙이니라.”
귀산과 추항은 계명을 받아 적고는 맹세했다.
“지금부터 계명에 어긋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큰절을 올려 감사의 뜻을 표했다.
인생의 지표를 얻은 두 낭도는 벅찬 가슴을 끌어안고 도성으로 돌아왔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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