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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숙의 프랑스명소산책] 도망자 볼테르와 시레이 성
마른 강의 지류인 블레즈의 계곡에 있는 아름다운 성
볼테르와 그의 뮤즈 샤틀레의 물리학·천문학 실험소
최인숙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5-01 06:31:00
▲ 최인숙 문화칼럼니스트·정치학박사
프랑수아-마리 아루에(François-Marie Arouet)는 바스티유 감옥에서 나와 볼테르로 이름을 바꿨다. 그의 본명 아루에는 라틴어로 AROVET라고 표기된다. 이 단어의 철자를 바꿔 볼테르(Voltaire)라는 이름을 지었다. 이 이름으로 그는 루소나 데카르트처럼 새로운 아이디어를 전파하는 계몽문학의 선봉장이 됐다.
 
1726년 어느 날, 볼테르는 로앙(Rohan) 후작과 파리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한판 싸움을 벌였다. 볼테르의 연극이 성공을 거두자 질투심에 약이 오른 로앙이 자신의 신분을 과시하기 위해 이름을 물었다. “아루에인가요? 볼테르인가요? 이름이 있긴 한가요?” 그러자 즉각 답이 왔다. “볼테르요! 내가 이 이름으로 명성을 얻게 되면 당신은 끝입니다!” 그러자 로앙의 충성스러운 하인들이 볼테르를 구타했다. 결국 평민 신분으로 귀족과 다툼을 벌인 죄로 볼테르는 체포됐고 바스티유 감옥에 한동안 수감됐다. 감옥에서 풀려나는 조건으로 그는 프랑스를 떠나야 했다. 그의 망명지는 영국이었다. 자유에 대한 갈증이 심했던 볼테르는 존 로크의 나라로 향했다. 그곳에서 3년간의 유배생활을 마치고 1729년 그는 프랑스로 돌아왔다.
 
파리 재정복에 나선 볼테르는 1730년에 브루투스, 1732년에 자이르를 출판했다. 이 두 편의 희곡은 3주 만에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그리고 1734년에 철학 편지를 출판했다. 권력을 향해 쓴소리를 날린 이 작품은 하나의 스캔들이 됐다. 의회는 이 책을 종교와 사회 질서를 위협하는 방탕한 것으로 보고 왕궁의 높은 계단 밑에서 불태웠다. 그리고 볼테르를 투옥시키려고 했다. 감옥에 가는 걸 두려워한 볼테르는 천재 친구 에밀리 뒤 샤틀레(Emilie du Châtelet) 후작 부인의 보호를 받으며 피신하기로 했다. 그가 간 곳은 파리 동쪽 250km 지점에 있는 시레이 성(chateau de Cirey). 마른 강의 지류인 블레즈 계곡에 자리 잡고 있는 이 성은 그림처럼 아름답다.
 
▲ 볼테르의 지적 보고였던 시레이 성. 시레이 성 제공
 
볼테르는 이 일이 있기 1년 전 파리에서 샤틀레 후작 부인을 만났다. 그녀는 야심찬 성격에 질투와 시기심이 강했고 남성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과학계를 장악하고 있었다. 볼테르가 위험에 처하자 그녀는 자신이 연구실로 쓰고 있는 시레이 성으로 망명할 것을 제안했다. 당시 독립한 로렌 지방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이 성은 볼테르가 여차하면 해외로 도피할 수 있는 아주 이상적인 피난처였다
 
볼테르는 철학 편지’가 해금되어 파리로 돌아갈 수 있을 때까지만 이 성에 잠시 머물 요량이었다. 그가 마을에 도착해 처음 보았을 땐 시레이 성은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 속에 무척 낡고 황폐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시레이 성에선 운하가 내려다보이고 지붕도 매우 높았다. 볼테르는 차츰 이곳이 마음에 들어 계획을 바꾸고 성을 쾌적한 장소로 만들어 시레이에 영구히 정착하기로 결심했다.
 
샤틀레 부인의 동의를 얻어 그는 대대적인 복원 작업에 들어갔다. 그런 다음 작은 성을 확장하고 테라스가 있는 긴 갤러리를 건설했다. 그는 예술과 과학에 대한 철학적 신념과 헌신을 갤러리 정문에 새겨넣었다. 정문 한쪽에는 조개껍질을, 다른 한쪽에는 해왕성 모양의 장식을 새긴 것이다. 볼테르는 생명의 기원이 바다에 있다고 보는 모페르튀이의 진화론적 사상에 한동안 심취해 있었다. 그는 이 바다 풍경을 통해 생명을 발견했다.
 
볼테르가 이렇게 성을 열심히 가꾼 데는 샤틀레 부인을 유혹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그녀는 시골의 보수적인 분위기보다 파리에서의 삶을 선호했다. 그런 샤틀레를 시레이에 붙잡아 두려면 성을 매력적으로 만들어야 했다. 결국 그녀는 파리와 자신의 즐거움을 포기하고 이 성에 머무르게 됐다. 이렇게 해서 두 뛰어난 존재는 18세기 가장 지적이고 위대한 사랑의 모험을 시작했다.
 
▲ 볼테르와 시레이 성이 박힌 10 프랑짜리 지폐. 위키피디아
 
이들은 여기서 뉴턴 철학·형이상학·인간에 대한 담론을 썼다. 또한 물리학·화학·천문학 실험을 했다. 특히 볼테르는 5년간의 과학 연구 결과를 가지고 두 권의 책을 썼고 여러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했다. 과학적 연구 외에도 그는 역사적·정치적·사회·철학적 작품뿐만 아니라 에피그램(epigram·풍자시)·에세이·희곡 등을 썼다. 이를 위해 볼테르가 서신으로 왕래한 사람은 1700명이 넘었다.
 
볼테르와 샤틀레 부인은 철학·과학 분야의 책들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또한 서로의 작품을 읽고 비평하기도 했다. 샤틀레 부인은 자신의 사무실과 연구실을 따로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낮 동안 서로 의견을 나누며 소통했다. 샤틀레 부인은 뉴턴의 유명한 수학 원리를 최초로 주석이 달린 프랑스어 번역본으로 제작하면서 과학·수학·물리학을 발전시켰다. 이 프랑스어 번역본은 1749년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에 완성됐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녀의 죽음으로 이 두 천재의 모험은 막을 내렸고 볼테르는 시레이 성을 영원히 떠났다
 
시레이 성에는 지금도 볼테르의 흔적이 가득하다. 그의 침실과 서재는 18세기 가구와 태피스트리로 장식돼 있다. 도서관에는 2만여 권의 책이 있고, 소극장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볼테르는 시레이 성에 머무는 동안 자신이 쓴 희곡을 공연하기 위해 다락에 소극장을 차렸다. 그리고 여기서 샤틀레 부인과 손님을 맞아 역할 놀이를 했다. 파리에서 그의 극이 정식 공연되기 전 시레이 성에서 리허설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 극장은 프랑스에서 18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몇 개 안 되는 개인 극장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지금은 복원 작업을 통해 예전의 화려함을 되찾았다. 시레이 성은 프랑스의 기성세대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프랑스 정부가 세기의 위인 볼테르를 기리기 위해 196310프랑짜리 지폐의 배경에 볼테르의 초상과 함께 이 성을 장식해 넣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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