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나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84] 당신의 이름을 안고 눕던 밤들

이 시간 주요기사

뉴스 > 연재소설

슬픔을 방해하지 않는 시간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5-07 06:30:10

이제 알 것 같습니다. 나는 갑순이였습니다. 천지의 으뜸도 아니며 하늘의 뜻을 따라 순하게 살지도 못했지만 갑순아, 하고 불렸기 때문에 갑순은 내게 제일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습니다. 오래 머물지 않고 떠나서 이름도 없는 내 아가는 나의 아가였기 때문에 아가, 하고 부르면 눈물이 나는 것입니다.

사람의 운명이 있다면 이름과 같은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랑이라고 부르면 사랑이 되고 그리움이라 하면 그리워지고 슬픔이라 하면 슬픔이 되는 것입니다. 점례와 옥순과 영자는 우리끼리 있을 때에도 서로를 마리아·소피아·나타샤 하고 부릅니다. 이제 그들은 나를 에바, 하고 부릅니다. 그렇게 싫었던 내 이름이, 할아버지께서 갑순아 하고 불러 주시던 목소리가 그립습니다. 갑순아, 나를 부르던 어머니가 너무 그립습니다. 이제 나를 갑순아 하고 불러 줄 사람이 없습니다. 이제 나는 에바입니다. 에바가 되고 싶어서 에바가 된 게 아니라 모두가 나를 에바 하고 불러서 에바입니다. 주결, 주결, 주결…. 오늘도 나는 당신의 이름을 안고 잠을 청해 보겠습니다. 당신의 갑순.

주결 하고 읽을 때 내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더 읽을 수 없었다. 그는 더 읽으라고 하지 않았다. 감정을 들키고 싶지 않다는 듯, 등도 돌리지 못하고 눈을 꼭 감고 굳은 턱으로 입술을 꽉 다물고 있었다. 크고 강인해 보이던 주결은 완연한 노인으로 돌아와 있었다. 별똥이 떨어지듯 불꽃이 튀는 소리만 조심스럽게 들렸다. 나는 노트를 접고 말없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주결이 혼자 있을 수 있도록 문을 꼭 닫고 방을 나왔다.

정하운은 1층 거실 소파에 누워 담요를 덮고 잠들어 있었다. 나는 흘러내린 담요를 끌어 올려 그녀의 어깨를 덮어 준 뒤 장작불을 더 키우고 건너편 소파에 쓰러지듯 몸을 던졌다. 긴장이 풀어진 나도 어느새 깊이 잠이 들고 말았다.

눈을 떴을 때는 이른 아침이었다. 불길은 잦아들었고 내 무릎에는 정하운에게 덮어 주었던 담요가 펼쳐져 있었다. 그녀는 주방에서 토스트와 커피를 준비하는 중이었다. 주결은 조금 전 2층에서 내려와 자신의 방에 들어가 누웠다고 했다. 나는 정하운과 함께 간단히 아침을 먹었다.

지난밤 쏟아진 폭설로 별장 주변은 온통 흰색으로 반짝였다. 적막과 슬픔이 눈과 함께 별장으로 쏟아져 내린 것 같았다. 그래도 해는 뜨고 바다는 검푸르게 파도를 일으켜 일렁였다. 주결을 보살피느라 몸과 마음이 가시처럼 곤두선 정하운과 선택의 갈림길에서 서성이던 나는 거의 말을 나누지 않았다. 나는 소파에 앉아 에바를 읽거나 정하운을 도와 식사를 준비하고 바닷가에 내려가서 산책을 했다.

오후가 되자 태양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눈을 녹여 버렸다. 내게는 주결을 살펴보라 말한 뒤 정하운은 차를 타고 시내에 나가 장을 봐 왔다. 그 사이 주결은 방을 나와 진료실에 들어갔다. 의자에 앉아 자작나무 숲길이 내다보이는 창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에바를 살리기 위해 밤낮없이 연구하던 시간이 박제되어 있는 공간에서, 모든 걸 포기하고 한 사람을 얻으려 했으나 끝내 잃어버린 사랑을 회상하는 마음은 얼마나 쓸쓸한 것일까. 몇 차례 문을 살짝 열어 살펴보았을 뿐 나는 그의 슬픔을 방해하지 않았다.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김규나 필진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