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이 View] “백성이 있어야 비로소 나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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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구 산업경제부장·부국장 기자페이지 + 입력 2024-05-08 00:02:40

집을 나서기가 무서운 5월이다. 각종 행사에 징검다리 연휴까지 가족이 함께 보내기에 이만큼 좋은 시간이 없다. 하지만 문제는 돈이다. 움직이기만 하면 모두 돈으로 때워야 하기 때문이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물가를 온몸으로 겪어 내야 하는 상황이다. 가정의 달이라고는 하지만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서민에게 외식 한 번 하려면 큰 결단이 필요하다. 지갑으로 가는 손이 무거운 게 서민의 현실이다.

외식 프랜차이즈 업체들은 가정의 달을 겨냥해 대대적인 가격인상에 나섰다. 나들이객들은 외식비 인상 여파를 피해 가기 어렵다. 최근 냉면과 김밥 등 대표 외식 품목 8개의 서울 지역 평균 가격이 1년 전보다 최대 7%대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냉면만 봐도 7.2%가 올라 한 그릇에 평균 1만1462원을 기록했다. 김밥조차 김 가격이 폭등하면서 ‘금밥’이라고 불린다. 여기에 피자와 햄버거·치킨·짜장면·칼국수·삼겹살까지 폭등하는 물가 홍수 속에서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다.

외식비를 아낀다고 해서 살림살이가 그다지 펴질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지난해 말 기준 가계신용 잔액은 1886조4000억 원을 기록했다. 전년 말 1867조6000억 원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1년 사이에 18조8000억 원이나 늘어난 것이다. 이것은 은행 등 금융기관에서 받은 대출에 아직 결제하지 않은 카드 사용액까지 합한 금액이다. 더욱이 고금리 부담이 커지면서 당장 이자도 갚지 못해 허덕이는 가정이 속출하고 있다. 높은 가계대출 상환 부담은 우리 경제의 시한폭탄이 될 것이란 경고마저 흘러나온다.

실제로 이러한 우려가 점차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고금리에 경기둔화까지 겹치면서 최근 연체율이 심상치 않다. 서민의 급전 창구로 통하는 신용카드사의 연체율이 코로나19 이전 수준으로 다시 상승했다. 국내 주요 카드사 대부분이 지난해보다 연체율이 올라 2019년 이후 최고치를 찍었다. 코로나19 이후 시행된 대출 만기 연장이나 이자 지원 등 지원책이 종료되면 연체율은 더 오를 수밖에 없다. 일반 서민과 영세자영업자들이 한계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는 셈이다.

저신용 서민이 주로 이용하는 저축은행의 연체율도 급등세다. 작년 말 저축은행 연체율은 6.55%로, 전년 대비 3.14%p 올라 2011년 저축은행 사태 이후 가장 큰 폭으로 상승했다. 지방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광주·전남·전북 지역 저축은행 연체율은 8.1%로 전년 대비 3.8%p 올랐다. 대구·경북·강원과 대전·충남·충북은 7.8%로 이들 지역 모두 1년 전보다 연체율이 3.6%p 높아졌다. 특히 영세자영업자를 대상으로 한 개인사업자대출 연체율은 일부 저축은행의 경우 10%를 넘어서는 곳도 생겨났다.

올해 1분기 경제성장률이 예상치를 크게 웃돌면서 정부는 연초에 제시했던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높일 예정이다. 앞서 기재부는 국내총생산(GDP) 지수가 분기별로 대략 0.5~0.6%씩 불어난다는 시나리오 하에 연간 2.2% 성장률을 내놓았다. 하지만 한국은행이 올해 1분기 실질 국내총생산이 전 분기 대비 1.3% 증가했다고 밝히면서 연간 성장률이 2.5%를 넘을 것이란 시각이 우세하다.

경제성장률 예상치가 올라간 것은 정부의 역할이 컸다기보다는 우리 기업들의 수출에 쏟아부은 노력이 맺은 결실이다. 반도체·자동차 등 우리나라 주요 수출 품목을 중심으로 수출이 기대 이상의 호조를 보이면서 전체 성장률을 끌어올릴 거라는 예측에서다. 스위스의 글로벌 투자은행인 UBS는 대외적으로 미국 경제가 내년까지 경기침체를 경험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며 한국의 대외 불확실성이 줄어 수출과 생산 회복에 속도가 붙을 것으로 봤다. 영국의 금융 그룹인 HSBC 역시 미국의 강한 성장세와 중국의 경기회복으로 글로벌 무역이 증가하며 한국의 수출 모멘텀을 이끌 것으로 전망했다.

경제성장률 전망치가 올라가면서 우리 경제가 곧 활력을 되찾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경제성장률 상승 전망에 들뜰 때가 아니다. 서민들의 고통이 줄어들기는커녕 갈수록 커지고 있어서다. 국민 생활이 안정되고 편안해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다.

1783년 전국에 걸쳐 기근이 들었다. 정조 임금이 백성의 고통을 통감하고 백성에게서 거두는 세금을 줄이도록 하자 담당 관리들이 국가 재정의 부족을 염려해 반대했다. 이에 정조는 “나라는 백성에 의지하고 백성은 나라에 의지하니, 백성이 있은 뒤에야 비로소 나라가 있다”며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지금은 서민에게 있어선 백고천난(百苦千難)의 시기다. 올해 경제성장률이 2% 후반을 기록할 것이라는 점은 분명 모두가 자축할 일이다. 하지만 고물가 속에서 각종 연체율과 자영업자 폐업률 등 ‘서민 고통 지표’들도 함께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 삶이 팍팍한 서민에게 경제성장률 상승 소식은 그저 남의 얘기일 뿐이다. 정치를 능숙하고 훌륭하게 하는 비법은 따로 있지 않다. 바로 국민을 등 따습고 배부르게 하는 게 최선의 정치다. 정부와 정치권에선 하루속히 서민 고통을 줄일 대안부터 내놔야 한다. 지금은 “백성이 있고 난 뒤에야 비로소 나라가 있다”는 정조의 말을 되새겨 볼 때다.

김준구 산업경제부장·부국장 jkkim@skyedaily.com 기자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