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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KBO리그 도루왕은 두산 베어즈의 정수빈이었다. 33살인 그가 39개로 도루왕이 된 것이 깜짝 놀랄 일은 아니다. 스피드로만 도루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1980년대 초 롯데구단이 100m 한국신기록 보유자이던 서말구를 플레잉코치로 발탁하고도 단 한 번도 경기에 기용하지 않았던 것은 투수 움직임에서 빈틈을 찾는 등의 주루 기술이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베이스 간 거리 90피트(약 27.43m)를 훔치는 데는 스피드뿐 아니라 야구적인 센스가 필요하다.
1993년 전준호 75개·1994년 이종범 84개·1995년 전준호 69개로 도루왕을 하던 시대와는 격세지감을 느낀다. 지금보다 경기 수가 훨씬 적었던 1980년대에도 30여 개 도루왕이 나온 적은 없었다. 80경기를 치른 프로야구 원년 시절에도 김일권(해태)은 도루를 53개나 성공시켰다.
요즘 도루왕 기록이 줄어들면서 ‘쌕쌕이’ ‘대도’ ‘바람의 아들’ 같은 별명도 별로 쓰이지 않는다. 이 중 ‘바람의 아들’은 야구뿐 아니라 스포츠 세계에서 두루 쓰이는 영광스런 별명이다. 운동의 근간이며 생명인 스피드를 갖췄다는 걸 뜻하기 때문이다.
역대 월드컵에서 유일하게 연속 해트트릭(1994년 미국월드컵·1998년 프랑스월드컵)을 기록한 아르헨티나의 가브리엘 바티스투타도 ‘바람의 아들’로 불렸다. 100m를 11초대 초반에 주파하는 스피드를 갖춘 바티였다.
이번 시즌을 앞두고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 입단한 이정후는 ‘바람의 손자’라고 불린다. 그는 호타준족을 자랑하며 해태-KIA 타이거즈의 4차례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던 ‘바람의 아들’ 이종범의 아들이다.
아버지로부터 야구 DNA를 물려받은 이정후는 아버지처럼 유격수로 KBO리그 히어로즈에 입단했지만 곧 외야수가 됐고 리그 최고의 타자로 성장했다. 그리고 5년 만에 아버지가 가 보지 못한 MLB에 진출했다. 그의 앞길엔 밝은 미래가 대기 중이다.
샌프란시스코 구단은 이정후를 ‘바람의 손자(grandson of wind)’라고 소개했다. 27세인 그가 ‘손자’라고 불리는 것은 감수할 수 있겠지만 좀 더 나이들면 아닐 것 같다. 더구나 어린 이정후의 손목을 잡고 야구장으로 이끈 어머니는 ‘바람의 며느리’인가. 아무래도 어색하다. MLB 시범경기에서 맹위를 떨치며 새 바람을 일으킬 이정후에게 멋진 별명을 지어 선물하면 어떨까.
박병헌 디지털뉴스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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