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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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궁궐이 어느 하나 뺄 것 없이 아름답지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고궁은 창덕궁이 유일하다. 건축사에 있어 조선 궁궐의 전형을 보여주는 데다 비원이 왕실 정원으로서 가치가 높기 때문이다.
창덕궁이 지어진 것은 조선 3대 왕인 태종 때다. 왕실 이궁으로 지어졌으나 조선의 왕들은 경복궁보다 창덕궁을 더 선호했다. 임진왜란으로 서울의 궁궐이란 궁궐이 다 불타 없어졌을 때도 창덕궁이 가장 먼저 재건되었다. 재건 후 300년 동안 창덕궁은 조선 왕실의 정궁 역할을 했다. 조선의 왕들이 특별히 창덕궁을 사랑한 이유가 있을까.
300년 가까이 조선의 정궁으로
경복궁은 태조 이성계가 세를 과시하기 위해 일부러 크게 지은 면이 없지 않다. 규모로만 따지면 중국 베이징의 자금성에 맞먹는다. 부피가 큰 만큼 경복궁을 한 번 수리하려면 비용이 어마어마했다. 조선의 왕들은 백성에게 차마 그 부담을 지울 수 없어 창덕궁에 만족했다고 볼 수 있다.
조선 말에 이르러 국격을 바로 세운다며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했다. 그때 백성의 원성이 하늘을 찔렀다. 조선이 무너진 원인 가운데 하나가 백성의 신임을 잃은 것이다.
창덕궁 뒤편으로 왕실 정원 ‘비원’이 숨어 있다. 창덕궁 후원의 명칭은 여러 가지인데 안쪽에 있다는 의미의 ‘내원’·북쪽에 있어 ‘북원’·금지된 정원이라는 뜻에서 ‘금원’으로 불렸다. 비원(秘苑)은 1904년 무렵부터 보이는 이름이다. 시기상 일제의 잔재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고종이 창덕궁에 비원(秘院)이라는 관청을 설치하면서 사람들이 이를 혼동한 것에 가깝다.
과거에는 창덕궁와 창경궁 사이에 담이 없었다. 일제가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꾸미면서 행락객들이 창덕궁 후원으로 마구잡이로 드나들었다. 이렇게 해놓고 일제가 왕의 후원에 ‘비밀의 정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근거가 부족하다.
자연 속의 궁궐
조선의 왕들이 창덕궁을 선호한 이유 중 하나가 구조적인 편안함 때문일 것이다. 보통 궁궐을 지을 때 건물을 세운 후 주변 조경을 한다. 그러다 보니 전체적인 분위기가 인위적이면서 삭막해진다.
하지만 창덕궁은 경복궁에 붙여 지은 건축물로 자연스럽게 북악산 줄기를 끌어들여 후원을 조성했다. 정자를 지은 후 나무를 심은 게 아니라 나무를 고른 후 그 옆에 정자를 들였다.
비원으로 들어서면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부용지’는 정조의 숨결이 밴 곳이다. 정조는 과거급제한 이들을 불러 연못가 부용정에서 합격 잔치를 벌이고는 했다. 부용정은 십자 형태의 독특한 건축물로 부용 즉 연꽃의 모양을 본뜬 것이다.
사각형 부용지 안에 둥근 형태의 작은 섬이 있다. 동양철학에서 사각형은 땅, 동그라미는 하늘을 뜻한다. 넓은 땅 안에 작은 하늘을 배치한 것이 재밌다. 그들이 하늘이 얼마나 넓은지 알았다면 둥근 연못 안에 네모난 섬을 만들었을 것이다.
사실 이 섬의 용도는 따로 있다. 정조는 연못에 배를 띄우고 신하들과 시 짓기 놀이를 즐겼다. 제때 시를 완성하지 못한 신하는 이 섬으로 잠시 귀양을 가야 했다. 제2의 세종이라 불릴 만큼 성군이었던 정조가 신하들을 벌주며 배꼽 잡고 웃었을 생각을 하니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정자의 숨결이 밴 부용지
부용정과 마주 보는 저편 언덕 2층 누각은 ‘주합루’다. 1층은 책을 보관하는 규장각으로, 2층은 물을 감상하는 누각의 용도로 사용되었다. 주합(宙合)이란 우주와 합일한다는 뜻으로 임금과 백성 간에, 그리고 군신 간 융화를 중요시했던 정조의 정치 철학이 담긴 이름이다.
주합루에 오르려면 ‘어수문’을 통과해야 한다. 어수란 물고기와 물을 가리킨다. 물은 임금이요, 신하는 물고기다. 물고기가 마음껏 뜻을 펼칠 수 있도록 드넓은 연못이 되어주겠다는 정조의 마음이 담겼다. 하지만 어수문을 통과할 수 있는 이는 임금뿐이다. 신하는 어수문 양쪽으로 난 작은 협문을 이용해야 한다. 성군에게도 군신의 위계질서는 중요했다.
부용정 동북쪽의 ‘영화루’는 꽃(花)과 어우러진다(暎)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영조가 직접 편액 글씨를 썼다. 영화당 앞쪽 넓은 마당이 ‘춘당대’다. 과거시험이나 무예 대회가 열리던 장소다. 때론 이곳에서 질펀한 궁궐 연회가 펼쳐지기도 했다. 과거 춘당대 앞으로 ‘춘당지’ 연못이 있었다. 춘당대와 춘당지 사이에 담장이 조성되면서 춘당지는 창경궁 권역으로 넘어가 버렸다.
참 독특하다, 매우 아름답다
부용지를 지나면 ‘애련지’다. 어느 신하의 갸륵한 아이디어였을까. 애련지에 입장하려면 ‘불로문’을 통과해야 한다. 불로문은 커다란 돌을 파서 이음새 없이 세운 Π자 형태의 문이다. ‘이곳을 통과하는 이는 늙지 않는다’는 의미의 불로문. 전서체로 쓰인 불로문 글자에서 왕을 생각하는 신하의 마음이 읽힌다.
비원에는 연못이 많다. 연못가에는 공식처럼 정자가 세워져 있다. 애련지에도 부용지처럼 자그마한 정자 ‘애련정’이 딸려 있다. 숙종이 붙인 이름으로 ‘애련’은 연꽃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왕의 덕성을 연꽃의 고고함에 견준 작명이다. 물가에 두 발을 담근 작은 정자의 모습이 물놀이 나선 아기처럼 앙증맞다.
애련지를 지나 만나게 되는 ‘관람지’는 한반도를 닮은 연못이라는 뜻에서 ‘반도지’라 불리던 곳이다. 관람(觀纜)은 뱃놀이를 구경한다는 의미다. 람(纜)은 배닻줄이라는 뜻. 흔하게 쓰이는 단어는 아니다.
‘관람정’은 현존하는 정자 중 가장 독특하다 할 만하다. 지붕·마루·기단이 전부 부채꼴이다. 덩달아 건물 부재까지 곡선 형태를 띠고 있다. 동쪽에 걸린 현판 또한 특이하다. 파초잎 모양의 현판에 흰 글씨를 새겼다. 국내에서 이런 모양의 정자와 현판을 본 적이 없다.
존덕정은 관람지 권역은 물론 비원 내에서도 화려하기가 으뜸이다. 육각의 존덕정은 겹지붕에 겹 기둥으로 거느리고 있어 한눈에도 범상치 않은 건축물인 것을 알 수 있다. 이게 다가 아니다. 천정을 올려다보면 겹겹의 보를 설치해 매우 복잡하게 만들었다.
조금 고개가 아프겠지만 천정을 유의 깊게 살펴보자. 먼저 대들보 위에 간보를 설치한 후 그 위에 포대공을 두어 중도리를 받치게 했다. 중도리에는 우물반자를 설치하고 그 안의 보개천장에 청룡과 황룡을 조각해 넣었다. 반자를 제외한 부분에는 연을 형상화한 기하학적 무늬를 그려 넣었다. 그 정교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서양인, 황제의 사진을 찍다
‘연경당’은 구조며 외관이 언뜻 사대부가의 집을 떠올리게 한다. 효명세자가 아버지 순조의 존호를 올리면서 연회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었다는 설과, 순조가 은퇴 후 편히 쉬기 위해 지었다는 설이 있다. 사대부가를 모방한 가옥이지만 규모가 109칸 반에 달한다. 왕의 공간이라는 것이 실감 난다. 일반 사대부가의 상한선은 99칸이다.
연경당 안채에는 부엌이 딸려 있었지만 음식은 반빗간이라고 하는 독립 주방에서 따로 만들었다. 안채 아궁이는 오로지 난방용으로만 사용했다. 왕실 가족이 쉬는데 음식 만든다고 옆에서 소리 내고 냄새 피우는 것을 저어해서였을 것이다.
관내 동쪽 비탈 ‘농수정’은 1884년(고종 21) 미국인 퍼시벌 로웰이 고종과 순종의 사진을 찍은 곳이다. 그는 아직 젊은 고종 황제와 어린 순종을 사진에 담았다. 생에 첫 사진임에도 서구 문물에 거부감이 없었던 고종 답게 표정과 자세가 자연스럽다.
연경당 사랑채 옆으로 독특한 건축양식의 선향재가 있다. 그 시절 흔치 않게 벽돌을 사용해 지은 건축물로 응접실 겸 서가로 이용되던 곳이다.
연경당을 나오면서 돌아보니 행랑채 딸린 솟을대문에 ‘장락문’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길이길이 즐거움을 누리라는 뜻으로 창덕궁 낙선재와 현판 이름이 동일하다. 연경당을 나서면 애련지로 길이 이어진다.
문화재청은 조선 왕실의 정원이었던 창덕궁의 문화재 보호와 생태 보호를 위해 관람 인원을 제한하고 있다. 후원 특별관람은 관람시간표에 맞춰 해설사의 인솔 아래 회차별 최대 100명(사전 인터넷 예매 50명·당일 현장발매 50명)만 입장 가능하며 개별관람은 불가능하다. 반도지 너머에 있는 옥류천은 겨울에는 개방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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