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나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194] 가면을 쓰고 사는 이유

이 시간 주요기사

뉴스 > 연재소설

사랑하는 것을 죽여 본 적 있는가?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10-21 06:30:10

나란 인간의 바닥을 보아 버린 하운은 더 이상 논쟁할 의욕조차 잃은 것 같았다. 내 인격의 밑바닥을 드러낸 것에 대해 혐오스러운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인 그녀가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누군들 결백하단 말인가.

“당신만 힘들고 혹독한 시간을 견뎌 온 것처럼 날 몰아붙이지 말아 줘요. 난 지금 미치지 않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견디고 있어요. 난, 살 자신이 없어요. 겁에 질려 버려서 살 의지를 일으켜 세울 수도 없다고요. 그런데 당신은 나를 치한, 아니 당신을 죽이기라도 한 것처럼 살인자 취급을 하고 있잖아요.”

내가 자기 연민에 빠져 궤변을 늘어놓는 동안 하운은 차츰 냉정을 되찾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이 너무 날카로워서 나는 심장이 베이는 것처럼 가슴이 아팠다. 하운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참지 못하겠는지 입을 열고 반박했다.

“어떻게든 살고 싶어요? 당신이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타인에게 무슨 짓을 해도 된다고 생각해요? 살아남는 것만이 우리 삶에 주어진 최고의 임무 같아요? 아뇨.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무엇을 사랑하며 살 것인가,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무엇을 느끼며 살아 있을 것인가, 나에게 중요한 건 그런 삶의 내용과 방향이에요. 그리고 에바는, 거짓을 사랑한 적 없어요. 가면 아래 숨겨야 하는 건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이지 거짓이 아니에요. 고통을 감추고서라도 지켜야 하는 삶의 가치, 그 의미를 꿋꿋이 지켜 내는 자신에 대한 신뢰, 그것이 가면을 쓰는 이유라고요. 그리고 내가 당신을 살인자 취급했다고요?”

풋, 그녀가 웃었다.

“당신은 살인이 뭔지 알아요? 사랑하는 것을 죽이는 게 어떤 기분인지 아냐고요? 그게 너무 끔찍해서 내가 나 자신을 죽일 수밖에 없는 마음을, 당신이 알기나 해요?”

하운이 더는 나를 마주 보기 싫다는 듯 발끈, 창가로 다가갔다. 창밖에는 한강의 검은 물결을 따라 도시의 불빛들이 일렁이며 흘러가고 있었다.

“최 박사님의 처방을 받은 그날 밤, 난 집으로 돌아갔어요. 동우와 살던, 그 집이었죠.”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생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밤이었다. 죽고 난 뒤 타인의 손에 정리될 집의 어느 한구석도 수치가 되길 원치 않았다. 하운은 약효가 마감되기를 기다리며 집안을 말끔히 청소했다. 샤워를 마치고 향수까지 가볍게 뿌린 뒤 새로 산 잠옷을 입고 침대에 누웠다. 멀뚱히 천장을 올려다보았지만 이내 죽음은 올 것 같지 않았다. 혹시 빠뜨린 것은 없을까, 하운은 눈을 감고 생각했다. 그러다 벌떡, 불에 덴 것처럼 놀라 몸을 일으켰다. 침대 사이드 테이블의 아래쪽 서랍을 열었다.

“나 없을 때 혼자 놀아.” 오래전 출장을 다녀온 동우가 짓궂은 얼굴을 하고 내민 선물이었다. 하운이 상자를 열었다. 남근 모양으로 깎은 나무 딜도는 결이 매끈하고 부드러웠다. 초콜릿 맛 콘돔과 젤도 함께 들어 있었다. “써 봤어?” 어쩌다가 침대에서 동우가 물었지만 하운은 고개를 저었다.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김규나 필진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