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나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75] 생명을 갉아먹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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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에서 온 작은 간호 천사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4-22 06:30:10

갑순의 방을 지나 내 방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나는 멈칫 뒤를 돌아보았다. 갑순의 방문은 몇 시간 전 내가 부주의하게 열어 둔 그대로였고 안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은 없었다. 그제야 내가 무심코 스탠드를 끄고 나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켜 놓아야 할까, 망설였지만 다른 데 신경 쓸 여유 같은 것이 내게는 없었다.

나는 벽난로에 불을 피운 뒤 침대 끝에 앉았다.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죽음이 코앞에 닥친 걸 안다면 사람들은 무엇을 할까. 나는 구원을 요청하려는 듯, 누군가 한 명은 내게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휴대전화를 열었다. 새로 온 전화나 메시지는 없었다. 전화번호 목록을 열었다. 오백 개가 넘는 이름과 번호가 있었지만 지금 상황을 이야기하고 상의할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통화 기록을 열고 통화한 사람들의 이름을 읽었다. ‘당신은 무엇입니까’라는 문자 메일을 받은 번호, 아직 이름으로 입력해 두지 않은 정하운의 번호, 애들 엄마, 용범 선배 그리고 유리.

유리가 전송했던 메시지에서 눈이 멎었다. 예비 신랑 신부의 모습. 그들의 결혼식은 이틀 후 일요일이었다. 내가 지금 결정한다면, 그래서 실패한다면 나는 죽고 그들은 결혼하리라. 같은 시간, 누군가는 시작하고 누군가는 끝난다. 새로울 건 없었다. 언제나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태어나고, 어떤 이는 출발하고 어떤 이는 도착한다. 해적 안대를 쓰고 축하하러 가 줄까. 이 결혼식에 이의 있는 분은 지금 말하세요, 주례가 물을 때 유치하게도 손을 번쩍 들어 훼방 놓는 상상을 해 보다가 피식, 나는 싱겁게 마음을 접었다. 하지만 이내 분노가 끓어올라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시간이 째깍째깍 흘러가고 있었다. 내 생명을 갉아먹는 소리였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긴 걸까. 왜 나만 이런 고통을 받아야만 하는가. 어디에도 답은 없었다. 그러나 답이 없는 문제가 있을까. 나는 우뚝 멈춰 서서 가방을 노려보았다. 정하운은 왜 내게 에바의 노트를 준 걸까. 혹시 내가 거기서 해답을 찾기 바랐던 건 아닐까. 심장이 빠르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나는 에바의 노트를 꺼냈다. 불 앞에 노트를 펴고 앉아 수많은 글자 속에 있을지도 모를 답을 파헤치기 위해 초조하게 글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 비비안의 숨소리가 가늘게 들립니다. 그녀가 몸을 뒤척이면 금빛 머리카락이 달빛을 받아 풍성하게 물결칩니다. 초록색의 눈동자를 가진 비비안은 독일어를 한마디도 할 줄 모르는 나와 근무 파트너가 되었을 때 이마를 잔뜩 찌푸렸습니다. 하지만 기숙사에서 같은 방을 쓸 수 있도록 간호부장의 허락을 받은 건 비비안이었습니다. 비비안은 자발적으로 나의 독일어 선생님이 되어 주었습니다. 불평하기보다는 하루속히 소통이 가능해지도록 나를 도와야 자신의 업무가 수월해진다는 것을 알고 기꺼이 책임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비비안은 병원 시설 곳곳으로 나를 데리고 다녔고 의료기기들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독일어 사전에서 단어를 찾아 읽어 주었습니다. 나는 그녀의 발음을 듣고 입 모양을 보고 따라 했습니다. 사전에 우리말로 소리 나는 대로 발음을 적고 밤이 되면 그날 배운 단어와 문장들을 노트에 정리했습니다. 한 달이 지나자 병원 업무에 관한 간단한 의사소통이 가능해졌고 두 달째부터는 혼자 환자를 맡을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말이 안 통하니 담당을 바꿔 달라고 불평하던 환자들은 동양에서 작은 천사가 왔다고, 하나둘 나를 대견하게 지켜봐 주었습니다. 내가 서른세 살인 걸 알고는 그러잖아도 큰 눈을 더 크게 치켜뜨며 놀라워했지만요.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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