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나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47] 민들레 뿌리 차를 마시는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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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동자는 당신과 나의 경계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3-12 06:30:10

나는 식탁에서 일어나 빈 그릇들을 개수대로 옮겼다. 최주결 박사와 정하운,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를 화제로 이야기하는 것이 나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괜히 박사의 신경을 날카롭게 할 필요는 없었다. 그도 더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의자에서 일어나 반찬 그릇들을 정리했다. 나는 박사와 함께 오래 살아온 동거인처럼 능숙하게 설거지를 마쳤다.

최주결 박사는 식탁 한쪽에 치워 두었던 바구니에서 약병을 열어 알약들을 이것저것 삼킨 후 커피포트에 물을 끓였다. 다기를 꺼내 식탁에 올려놓은 뒤 침묵이 물을 데우고 찻물을 우려내기라도 한다는 듯 눈을 감고 말없이 기다렸다. 박사는 내 궁금증을 알고 있으면서도 쉽게 입을 열지 않을 기세였다.

아버지가 엄숙히 기도를 올릴 때마다 눈을 뜨고 사람들을 관찰하던 어린 시절처럼, 나는 눈을 굴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창밖은 완연한 어둠이 드리워져서 검은 유리창은 지하철 기관석의 앞 유리창처럼, 전등 불빛이 박사와 내 모습을 선명하게 반사했다. 창의 맞은편 벽에는 선반이 걸려 있었는데 똑같은 크기의 유리병들이 나란히 진열되어 있었다. 병마다 식물의 이름이 깔끔한 손 글씨로 적혀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초점을 맞추어 더덕·칡·천문동·당귀뿌리·생지황·겨우살이·까마중 하며 소리 없이 이름표를 읽었다.

아버지의 기도가 끝날 듯 말 듯 지루하게 이어졌던 것처럼, 노인은 물이 끓고 포트 스위치가 자동으로 꺼진 뒤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었다. “숨을 쉬거라!”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고 커다란 손이 내 뺨을 후려칠 것만 같았다. 내가 참지 못하고 후 하고 숨을 토해냈을 때 노인이 눈을 떴다. 주전자를 들고 다기에 물을 붓고 열기가 식기를 기다린 후 찻잎을 띄웠다. 가볍게 내린 커피처럼 빛깔이 연하게 우러났다.

“민들레 뿌리 차라네. 피를 맑게 하지.”

느릿하게 우려낸 차를 두 개의 잔에 나누어 따른 뒤 노인이 찻잔을 건넸다. 진료실에 데려가 나를 진찰할 마음은 없어 보였다. 무릉도원의 신선이라도 되는 양 노인은 차를 음미했다. 그가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와 긴장한 내가 딸꾹질 같은 숨을 삼키는 소리가 동시에 적막을 깼다.

“뭘 알고 싶은 건가?”

내가 무엇을 궁금해 하는지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었다. 그걸 알기에 어떻게 말해야 할지 난감했다. 미래를 낙관할 수 있는 예언을 바라며 점술사 앞에 손금을 들이밀듯 치료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싶다고, 그 희망을 안고 이곳까지 찾아왔다고, 이토록 단순한 바람을 설명하기에 내가 가진 언어는 너무 가난했다.

“모르겠습니다.”

나는 솔직히 말했다. 그런데도 노인은 납득한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의 홍채는 지문보다 더 명확하게 타인과 나를 구분짓는다네.”

박사는 곧 도살당할 어린 양을 지켜보는 것 같은 연민과 함께 체념을 종용하는 냉엄함을 얼굴에 띄우고 계속 말했다.

“시각이 아닌 후각으로 아군과 적을 식별하도록 발달해 온 동물과 달리 말일세. 그들은 눈이 작고 공막도 어둡거든. 그래서 풀숲에 숨은 맹수가 눈알을 굴리며 어떤 놈을 노리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보이지 않는다네.”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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