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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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왕이 쌍심지를 돋우며 벌컥 화를 냈다.
“내목 왕자가 병약하다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 자를 수장으로 삼은 것도 그렇고, 그런 일이 있었으면 진작 알렸어야 하지 않느냐. 그래야 작전을 수정하지!”
해선은 바들바들 떨었다.
“구주 축자에서 전령을 보냈다는데, 중간에 신라군에게 잡힌 듯합니다. 소장은 이 사실을 알자마자 출발해서 이곳까지 쉬지 않고 달려온 겁니다.”
무왕은 일이 어렵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왜군이 군사를 보내지 않았다면 이번 전쟁은 승산이 없었다. 무왕은 할 수 없이 아막성을 포기하고, 사비성으로 군사를 퇴각시켰다.
건품은 초전에 백제군을 몰아낸 무은의 공로를 크게 치하했다. 그는 군사들에게 명해 소타성·외석성·천산성·옹잠성의 네 성을 쌓아 방비를 새롭게 하고, 국경을 넘어 백제 땅까지 나아가 무력시위를 하고 돌아왔다. 이는 백제가 도발할 엄두를 못 내도록 못을 박아 두려는 의도였다.
신라가 아막성 아래 운봉고원 서쪽에 4개의 성을 쌓았다는 보고를 받은 무왕은 크게 노했다. 이는 백제에 큰 위협이 되는 사건이었다. 운봉고원은 북동쪽으로 아막성과 맞닿아 있고, 서쪽으로 남원 평야가 내려다보였다. 신라군이 이곳을 점령하면 바로 남원 평야를 가로질러 금마저와 황산벌을 거쳐 백제의 도성인 사비성에 이를 수 있었다.
무왕은 좌평 해수(解須)에게 보기 4만을 주어 네 성을 치게 했다.
해수는 지략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지금 이대로 기세가 오른 신라를 상대로 공성전을 벌인다면 백제군의 피해 또한 클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해수는 계책을 써서 신라군을 속이기로 했다. 먼저 늙거나 병든 군사만을 선별하여 부대를 만든 후 부장 해선(解宣)으로 하여금 그들을 이끌고 천산성(泉山城)으로 나아가 신라군을 유인하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정예병을 이끌고 천산 서쪽의 넓은 진펄에 숨어서 신라군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천산성을 지키고 있던 무은은 백제군이 나타나자 잔뜩 긴장했다. 그런데 막상 보루에 올라가 백제군의 형세를 살피니 군기가 허술하고 군사들의 움직임에 절도가 없어 보였다. 오합지졸 같은 백제 군사들의 모습을 보고 자신감을 얻은 무은은 성문을 열고 나가 백제군을 공격했다.
백제 장군 해선은 신라군을 맞아 싸우다가 못 이기는 척하며 군사를 후퇴시켰다. 무은은 백제군이 달아나는 것을 보고 용기백배하여 기병 수백 기만을 이끌고 맹렬히 추격했다.
귀산은 평소답지 않게 서두르는 아버지가 걱정스러워 뒤를 바짝 따랐다. 그러나 신들린 듯 달리는 무은의 말을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백제의 패잔병을 뒤쫓던 무은이 천산의 외곽을 돌아 진펄에 이르렀을 때였다. 눈앞에 무성한 수풀이 끝없이 펼쳐져 있고, 그 사이로 백제 군사들이 흩어져 달아나는 모습이 보였다.
무은은 수풀 아래가 진흙 수렁인지도 모르고 군사들을 독려하여 뛰어들었다. 수풀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신라의 군마는 진창에 빠져 꼼짝도 못하는 신세가 됐다.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칠수록 말발굽은 더욱 깊이 빠져들어 갔다.
신라 군사들이 당황하고 있을 때였다. 수풀 사이에서 함성이 들리는가 싶더니 그 순간 사방에서 갈고리창이 튀어나와 말의 다리를 베어 쓰러뜨렸다. 무은을 비롯한 신라 기병들은 순식간에 백제군에게 잡혀 죽거나 포로가 됐다.
뒤늦게 진펄에 도착한 귀산은 아버지가 결박 지워져 끌려가는 모습을 봤다. 그는 부친을 구하기 위해 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들려 했다. 이를 본 추항이 벗의 앞을 가로막았다.
“적들의 기세가 강건하니 이대로 달려들었다가는 아까운 목숨만 잃을 뿐이네.”
귀산이 핏발 선 눈으로 추항을 노려봤다.
“일찍이 원광법사께서 말씀하시길 효도로써 부모를 섬기고 충성으로써 나라를 섬기며 싸움에 임해서는 물러섬이 없어야 한다고 하셨네. 만약 지금 나아가 싸우지 않는다면 스승의 가르침을 모두 저버리는 것이 되네.”
귀산은 장창을 휘두르며 백제군 사이로 뛰어들었다.
추항은 친우의 처연한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나 또한 벗과의 신의를 저버릴 수 없다. 이곳에서 귀산과 함께 산화하겠노라.”
추항도 귀산의 뒤를 따랐다.
귀산은 마치 복마전을 제압하기 위해 튀어나온 금강신장(金剛神將)처럼 백제 진영을 누비며 창을 휘둘렀다. 그의 창이 무지개를 그릴 때마다 적군의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귀산이 온몸에 피칠을 하고 아버지 앞에 이르자 호송하던 백제 군사들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폭풍우처럼 거칠 것 없이 덤벼드는 귀산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군사들을 제압한 귀산은 말에서 뛰어내려 아버지의 포승을 풀었다. 그리고 자기 말에 아버지를 태워 신라 진영으로 보냈다.
이때 귀산의 등 뒤로 적군의 창이 날아왔다. 절체절명의 순간 어디선가 커다란 도끼가 날아와 창을 튕겨 냈다. 연이어 백제 군사의 비명이 들려왔다.
귀산이 놀라 뒤를 돌아보니 수십 군데를 베여 갑옷이 누더기가 된 추항이 피칠을 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매번 기다리지 않는군.”
일그러진 귀산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주위를 살피니 백제 군사들이 두 사람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들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포위망을 좁혀 왔다.
귀산은 추항을 돌아봤다.
“자, 이번엔 같이 가세!”
가슴에서 끓어오르는 정열을 주체치 못해 새빨갛게 타오르는 모닥불로 날아드는 부나비처럼 두 사람은 적진을 향해 뛰어들었다. 두 사람이 가는 곳마다 백제 군사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하지만 아무리 무예가 뛰어나도 압도적인 수의 적군을 당해내기 어려웠다. 어느 순간 그들은 백제 군사들에게 파묻혀 보이지 않게 됐다.
귀산과 추항의 장렬한 죽음을 본 신라 군사들의 가슴속에선 분노가 치솟았다. 신라군의 투혼이 활화산처럼 살아난 것이다.
분노한 신라군 앞에서 백제의 주력 부대는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쓰러진 백제 군사의 시체가 들판을 메웠다. 이렇게 백제군은 전투에서 완패했다. 백제 장군 해수는 간신히 목숨을 건져 사비성으로 돌아갔다.
완승을 한 건품은 진평왕에게 귀산과 추항의 공을 아뢰었다. 국왕은 이들의 충의를 기려 친히 안라의 벌판에서 시신을 맞이하고,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렀다. 그리고 귀산에게 나마, 추항에게 대사의 관등을 추증했다.
후일 이들의 정신은 화랑도의 근간인 세속오계로 승화되었다.
진평왕에게는 딸이 셋 있었다. 첫째가 천명(天明)이고, 둘째가 덕만(徳曼), 셋째가 선화(善化)였다. 마야 왕후가 죽고 아들이 없었기에 왕위는 자연히 장녀인 천명에게 이어져야 했다. 하지만 국왕은 진지왕의 아들인 용춘(龍春)을 후사로 마음에 두고 있었다.
폐위된 진지왕이 유궁에 갇혀 있다가 3년 만에 죽었을 때 용춘은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어렸다. 진평왕은 어린 사촌을 가엾게 여겨 친동생처럼 아꼈다.
진평왕은 용춘이 상처받을까 두려워 궁인들에게 진지왕에 대해서는 일절 발설치 못하게 했다. 하지만 아우의 눈과 귀를 영원히 막을 수는 없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용춘이 관례(冠禮)를 치를 나이가 됐다. 그는 성품이 온화하고 공손하여 국왕과 왕후는 물론 왕실과 조정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진평왕은 아우를 위한 성대한 관례식을 열었다. 예식에 모인 사람들은 한마음으로 그가 신라의 기둥으로 자리 잡기를 기원했다.
예식이 끝난 후, 용춘은 왕의 부름을 받고 침전으로 갔다. 진평왕은 방으로 들어온 용춘을 가까이 앉혔다.
오랜 머뭇거림 끝에 왕이 어렵게 얘기를 꺼냈다.
“이제 너도 어른이 되었으니 알아야 할 일이 있다.”
진평왕은 지난날 궁정에서 벌어진 참극을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얘기를 모두 듣고 난 용춘은 한동안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아버지의 죽음은 너무도 비참했다. 더구나 그 죽음이 자신을 돌봐준 국왕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이 그를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용춘은 국왕의 고백을 들은 후에 여러 날을 고민했다. 그리고 궁궐을 떠나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는 분노와 실의에 찬 생부의 모습이 자꾸 떠올라 더는 궁에 머물 수 없었다. 몰래 궁을 빠져나온 용춘은 화랑도의 풍월주인 문노를 찾아갔다. 문노는 어릴 때부터 학문과 무예를 가르친 용춘의 스승이었다.
용춘은 문노의 낭도가 된 이후로 매사에 겸손하고 신의를 중시했다. 그는 남을 위한 일이라면 제 몸을 돌보지 않고 베풀었기에 낭도들의 신임을 얻었다.
용춘은 낭도들과 마음을 터놓고 교유했다. 그중에서도 부제인 비보랑(祕宝郞) 형제와는 결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가까웠다. 그는 비보랑을 형으로 섬기고, 비형랑을 아우로 삼아서 제 목숨처럼 아꼈다.
그렇게 3년이 지난 어느 날, 문노가 용춘을 따로 불렀다.
“네가 내 뒤를 이어 풍월주의 자리를 맡아 줘야겠다.”
문노는 용춘을 어릴 때부터 보아왔기에 됨됨이를 잘 알았다. 그라면 화랑도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 가리라 확신했다.
“저는 그런 무거운 짐을 질 수 있을 만큼 여물지 못했습니다.”
용춘은 극구 사양했다. 그는 부제로 있는 의형 비보랑을 제치고 풍월주의 자리에 오를 수 없었다. 이는 신의를 저버리는 일이었다. 용춘이 워낙 완강히 거부했기에 문노를 할 수 없이 비보랑을 차기 풍월주로 지명했다. 그리하여 부제 비보랑이 문노의 뒤를 이어 풍월주의 자리에 올랐다.
문노의 문하에서 오랫동안 가르침을 받았던 비보랑은 스승의 법제를 그대로 이었다. 그는 신분이 미천한 자라도 능력이 있으면 발탁했고, 약한 자를 돕는 데 힘을 아끼지 않았다. 용춘도 전력을 다해 풍월주를 보좌했다.
이때, 화랑도 내에는 아직도 미실의 힘이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설원랑 이후 낭도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인망이 높은 문노에게 풍월주 자리를 넘기기는 했지만, 여전히 낭도들 사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풍월주의 자리가 문노에게 돌아가자 미실의 동생으로 궂은일을 도맡았던 미생의 불만은 더할 나위 없이 컸다. 설원랑의 부제로 있을 때만 해도 자신이 다음 대의 풍월주가 될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기 때문이다.
미생은 화랑도 내에서 연륜과 명성을 볼 때, 문노가 자기보다 위에 서는 것은 인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새파란 비보랑이 문노의 제자라는 이유로 자신을 제치고 풍월주가 된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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