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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화를 풀이하면 ‘물가의 신선’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신선이라고 하면 흰 수염 길게 기른 노인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작은 키에 희고 노란 꽃을 피워 올리는 수선화에 흰 수염 휘날리는 노인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보다는 ‘물의 요정’이라는 수식이 더 그럴 듯하지 않은가.
국내 수선화 여행지로 제주를 먼저 꼽는 것은 추사 김정희에 얽힌 이야기가 여행의 맛을 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주의 수선화는 2월까지만이다. 4월의 수선화는 육지에서 찾아야 한다.
말에게 먹이로 주던 꽃
수선화는 생김새부터가 독특하다. 꽃을 보호하는 6개의 ‘꽃덮이’ 조각과, 술잔 모양의 ‘덧꽃부리’로 나뉜 이중의 꽃 구조가 어쩐지 이 세상 꽃 같지 않다. 봉긋한 덧꽃부리는 요정의 노란 드레스를 연상시킨다.
그렇다고 수선화의 생김이 다 같은 것은 아니다. 제주수선화는 그 모습이 일반 수선화와 사뭇 다르다. 덧꽃부리 대신 너풀거리는 또 다른 꽃잎이 그 자리에 오글오글 피어 있다. 제주수선화는 ‘말마농’으로도 불린다. ‘말(몰)’이란 크다는 뜻이며 ‘마농’은 마늘을 뜻한다. 큰 꽃이 피는 마늘이라는 의미다.
추사 김정희는 수선화를 매우 좋아했다. 24세 때 아버지를 따라 연경(베이징)에 갔다가 수선화를 처음 보고는 그 아름다움에 홀딱 빠졌다. 그 뒤로 어렵게 꽃이 구해지면 정약용에게 선물로 보내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수선화는 조선에서 보기 드문 식물이었다.
안동김씨 세력의 농간으로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된 그는 그곳에서 온 사방에 수선화가 피어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심지어 제주 사람들은 그것이 귀한 줄도 모르고 말이나 소에게 먹이는가 하면 밭고랑에서 캐내 멀리 던져버리는 게 아닌가.
제주에는 흰색 꽃덮이에 노란 덧꽃부리의 금잔옥대(金盞玉臺)도 흔하지만 추사가 보았던 꽃은 말마농으로 보인다. 그가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 “꽃이 크고 한 가지에 10여 송이가 맺히며 화피 갈래 조각은 8·9개에 이른다”고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수선화는 추사가 유배 갔던 대정읍 일원에 특히 흔하다. 제주에서는 이 꽃을 1~2월에 주로 볼 수 있는 것에 비해 육지에서는 3·4월에 집중적으로 피어난다.
산언덕에 파도치는 수선화 물결
충남 서산의 ‘유기방 가옥’은 최근 봄꽃 여행지로 주목을 끄는 곳이다. 유기방 가옥이라고 해서 유기를 만드는 공방이라고 오해하면 안 된다. 집주인 유기방 씨의 이름을 따왔을 뿐이다. 이 집에는 여미헌(餘美軒)이라는 또 다른 이름이 있다. ‘여유롭고 아름다운 집’이라는 뜻으로 2만 평 수선화 꽃밭 속에 오롯이 들어앉아 있는 모습이 택호와 썩 잘 어울린다.
여미헌이 자리 잡은 곳은 ‘큰말’이라 불리는 마을의 가장 안쪽 산이다. 수선화가 아니더라도 송림 군락지가 기품 있게 자리 잡고 있어 사계절 경치가 그만이다.
이 집의 가장 큰 특징은 급한 경사지로부터 가옥을 보호하듯 둥글게 감싸 안고 있는 후면 담장이다. 가옥 내부를 보면 동쪽에는 ㅡ자형의 안채가, 서쪽에는 L자형의 사랑채가 자리 잡고 있고, 사랑마당과 안마당을 야트막한 담장이 가르고 있다.
1988년 안채 앞에 있던 중문채를 헐고 현 누각형의 대문채를 올렸을 뿐 유기방 가옥은 1919년 건축 당시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이에 2005년 충청남도 민속문화재 23호로 지정되었다.
가옥의 아름다움도 아름다움이지만 일대는 제비가 날아가는 형상의 ‘비연’ 지세로 소위 말하는 명당이다. 정종의 자손들이 400년간 터를 잡고 살면서 유수의 관리를 배출했다고 한다.
여미헌 고택이 유명세를 타면서 전국에서 찾아오는 상춘객이 늘었다. 이에 2018년 봄부터 고택 보존과 수선화 관리를 위해 입장료를 받고 있다. 입장료는 8000원이다.
2만 평 전체가 일시에 수선화 꽃을 피워 올리는 것은 아니다. 햇볕이 잘 드는 후원과 집 뒤 경사로는 3월 말부터, 그늘이 깊은 비자나무 구역은 4월부터 꽃을 피워 올린다. 덕분에 넉넉하게 한 달 동안은 수선화 꽃물결을 감상할 수 있다.
흰 나무 노란 꽃의 어우러짐
경기도 광주 화담숲에서도 4월 말까지 ‘봄 수선화 축제’를 진행한다. 자작나무숲과 탐매원 등에서 총 37종 10만 송이의 수선화 물결과 만날 수 있으며 화담숲 인근 곤지암리조트 시계탑 광장과 엘리베이터·L빌리지 입구에서도 수선화 축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자작나무숲의 경우 하얀 수피의 자작나무 2000여 그루와 노란 수선화 꽃밭이 한데 어우러져 비경을 연출한다. 자작나무는 수선화 덕에 우아함이 빛나고 수선화는 자작나무 덕에 그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탐매원에서는 연둣빛 신록이 조금씩 돋기 시작한 매화나무와 수선화의 어우러짐이 또 다른 매력을 발산한다. 관람객은 매화나무와 수선화가 동시에 뿜어내는 봄의 향기에 정신이 어질해진다.
‘봄 수선화 축제’에서는 꽃과 나무의 이야기를 듣는 힐링 테마 숲해설 코스를 운영한다. 이 코스는 이끼원·자작나무숲·소나무정원·원양연못으로 이어지는 테마원 산책을 겸한다.
체험형 프로그램도 △계절별 소분재 만들기 △이끼와 식물을 사용한 테라리움 만들기 △나만의 사육장 만들기로 풍성하게 준비돼 있다.
수선화는 ‘한 떨기 수선화’라는 관용어가 있을 정도로 외관이 연약해 보이지만 보기보다 강인한 꽃이다. 봄을 알리기 위해 제비보다 먼저 우리 곁을 찾아오며 구근을 그대로 두어도 얼거나 마르지 않고 매해 같은 자리에 꽃을 피워 올린다.
대포딜(daffodil)과 나르시서스(Narcissus)는 다른 꽃이 아니라 전부 수선화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대포딜이 정식 영어 이름이라면 나르시서스는 학명(속명)이다.
수선화는 ‘자아도취’ ‘존경’ 등 상반되는 꽃말을 가지고 있다. 사실 자기도취와 존경은 종이 한 장 차이다. 사랑이 안으로 향하면 자기애가 되고 밖을 향하면 존경이 된다.
수선화의 계절을 맞아 나를 사랑하는 만큼 남을 존중하고, 남을 존경하는 만큼 나도 사랑하는 그런 하루하루로 만들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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