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으로 쓰는 역사 [33] 백성들을 따뜻하게… 의복 혁명의 씨앗된 ‘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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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 대롱 아닌 주머니에 목화씨 숨겨 온 문익점

스카이데일리 기자페이지 + 입력 2024-10-21 11:15:55

▲ 아침에 은은한 미색으로 피어난 목화꽃은 저녁에 오므라들면서 고운 분홍색으로 변한다. 윤상구 사진작가

꽃들을 유심히 관찰해보면 그 성질이 참 다양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침이든 저녁이든 정해진 시간에만 꽃을 피우고 그 시간이 아니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꽃잎을 다물어버리는 꽃이 있는가 하면 며칠을 꿀까지 뚝뚝 떨어뜨리며 벼르듯 꽃망울만 키우다가 어느 날 밤 기습적으로 피고 다음 날 아침이면 말끔히 지는 꽃도 있다. 심지어 분명히 꽃처럼 생겼는데 구조상 꽃이 아니라는 ‘꽃’도 있다.

목화꽃도 특이한 꽃 중 하나이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품종은 아침에 은은한 미색으로 피었다가 저녁에 오므라들면서 분홍색으로 변한다. 며칠 후 꽃은 떨어지고 3각형의 작은 꼬투리가 맺히는데 이것이 ‘다래’다. 그 다래 안에서 만들어진 솜털이 면직물이나 솜의 원료가 된다.

고려 말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돌아올 때 목화 씨앗을 붓 대롱에 숨겨왔다고 알려졌지만 조선 태조실록 문익점 졸기에는 ‘길가의 목면 나무를 보고 그 씨 10여 개를 따서 주머니에 넣어 가져왔다’고 쓰여 있다.

목화 재배에 성공하고 보급에 앞장선 정천익

▲ 목화는 솜이나 옷감을 만들고 그 씨로는 기름도 만드는, 버릴 것 없는 유익한 작물이다. 윤상구 사진작가

목화씨를 들여온 이는 문익점이지만 목화 재배와 보급에 힘쓴 사람은 그의 장인 정천익이다. 정천익은 자신이 거둔 목화 씨앗을 이웃에 나누어주면서 재배를 권장했다. 어느 해인가 홍원이라는 중국 승려가 정천익의 목화를 보고 반가워하며 실 뽑고 베 짜는 기술을 가르쳐주고 기구까지 만들어 주었다. 베 짜는 기술은 이웃에 전해졌고 10년도 채 되지 않아 전국에 보급되었다. 이런 기록 역시 태조실록에 남아 있다.

어찌 되었든 문익점이 목화 씨앗을 원나라로부터 가지고 온 것은 사실인 듯하다. 한반도에서 그 이전에도 재배되었다는 설이 있지만 목화가 민간에 널리 보급된 것은 문익점 이후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문익점이 목화를 들여온 것은 가벼운 일이 아니다. 한겨울에도 베옷을 입고 지냈을 서민들이 솜옷을 입게 되었으니 아마 평균 수명도 몇 해 늘어났을 것이다. 말 그대로 의복 혁명의 씨앗인 것이다.

목화는 전 세계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식물로 인식된다. 미국에서는 남북전쟁의 원인이 되었고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의 원동력이 되었다. 목화는 솜이나 옷감 외에도 쓸모가 많다. 무르익은 다래를 따고 남은 줄기는 땔감으로 사용했고 그 씨로는 기름도 짰으니 그야말로 버릴 것 없는 유익한 작물이다.

목화꽃을 가장 좋아한 왕비 후보자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는 왕비로 간택될 때 어떤 꽃을 제일 좋아하느냐는 영조의 물음에 목화라고 대답했다. 다른 꽃들은 한 시절만 화사하게 피지만 목화는 백성의 옷이 되어 평생 따뜻하게 해주는 공이 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15세 때 66세 영조의 계비가 된 정순왕후가 간택 자리에서 당차고 영리한 면모를 보였다는 일화는 더 있다.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이 무엇이냐고 영조가 물으니 정순왕후는 인심이 가장 깊다고 말했고,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고개가 무엇이냐는 물음에는 보릿고개라는 답을 하여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또 간택 장소에서 다른 후보들은 놓인 대로 방석에 앉았지만 김씨는 방석을 치우고 자리에 앉았다. 그 이유를 묻자 김씨는 방석에 아버지 이름이 적혀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노론 가문의 딸이었던 정순왕후는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데 한몫했다. 그래서 정순왕후는 정조 즉위 후 대비가 되었지만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하지만 정조가 세상을 떠나고 11세의 순조가 즉위하자 다시 기회를 맞이했다. 어린 순조 뒤에서 수렴청정을 했기 때문이다.

정순왕후는 사도세자에게 우호적이던 시파 인사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그 작업의 하나가 천주교 박해였다. 시파 인사 중 남인들이 천주교에 많은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정순왕후는 다섯 집씩 묶어 서로 감시하게 하고 문제가 생기면 다섯 집을 모두 처벌하는 오가작통법을 통해 천주교 말살 정책을 시행하였다.

정조가 수립한 정치 질서를 부정했던 정순왕후

1801년 신유사옥이라 불리는 천주교 박해는 남인과 실학자를 제거하기 위한 정권 다툼의 결과였다. 물론 겉으로는 천주교 교리가 유교 이념이 바탕이 된 조선의 전통 체제를 흔든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이때 천주교도 300여 명이 처형되었고, 종친인 은언군(철종의 할아버지)도 사사되었으며 정약용‧정약전 형제는 전라도에 유배되었다.

정순왕후는 정조가 수립한 정치 질서를 부정하고 정조의 개혁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노선을 밀고 나갔다. 그런 정순왕후도 막지 못한 일이 있었는데 바로 시파였던 안동 김씨 가문에서 손주며느리가 들어오는 것이었다.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자, 그녀의 친정 인물들을 비롯한 벽파는 조정에서 대부분 숙청되었고 60여 년 동안 지속된 안동 김씨 세상이 시작되었다.

백성을 따뜻하게 해주기에 목화꽃을 좋아하고 보릿고개의 애환과 인심의 중요함을 알았던 정순왕후는 애민 정신의 소유자인 듯하다. 그러나 수렴청정 동안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사를 돌봤다는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역사책을 기록한 사가들이 정조를 숭모하는 마음에 정순왕후의 업적을 폄훼한 것일까? 역사의 진실에 다가가는 길은 참 멀고도 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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