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근의 미디어와 정치] 언론노조의 공영방송 붕괴시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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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근 필진페이지 + 입력 2023-08-29 06:31:20

지난주 KBS 경영진과 노동조합은 노사(勞使) 동수 4인으로 구성된 고용안정위원회 설치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협의 각서에 서명했다. 이에 따라 향후 KBS는 ‘경영상의 이유나 분사·합병·매각 같은 경영환경 변동에 따른 구조조정 기준 및 조건’을 결정하는 데 있어 노조와 협의해야 한다.

향후 방송구조 개편이나 경영 악화에 따른 구조조정에 노동조합이 개입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준 것이다. 말이 좋아 협의이지 사실상 KBS 경영진이 경영권을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법적으로 배임행위인가를 놓고는 논란이 있을 수 있겠지만, 경영진과 노조가 합세해 수신료 분리 징수와 향후 예상되는 공영방송 구조개혁에 저항하겠다는 의지를 보여 준 것이라 할 수 있다.

7월 초 방송통신위원회가 수신료 분리 징수를 의결하면서 KBS 구조개혁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예측이 확산되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노사 합의를 조건으로 하는 고용 협약을 추진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러자 구조 개편이나 인사 문제에 노조와의 합의를 조건으로 다는 것은 불법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KBS 이사회도 강하게 문제점을 지적하고 경고했다.

하지만 경영진과 노조는 ‘합의’를 ‘협의’로 수정해 이사회 경고가 있은 다음 날 전격적으로 협의 각서에 서명했다. 물론 ‘협의’라는 내용을 불법이라 단정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 대신 협의 각서는 “위원회는 노측 대표가 위원회의 목적에 해당하는 사안에 관하여 자료를 요청할 때 제공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어쩌면 합의보다 더 강한 독소조항이 들어 있다 할 수 있다.

구조조정 내용을 노조에게 공개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상대방과 시합하기 전에 어디를 공격할지 미리 알려주는 것과 같다. 이렇게 되면 공영방송 구조개혁은 사전 저항에 밀려 시작하기도 전에 무력화될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배임행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말도 안 되는 노사 합의는 경영진과 노조가 동지적 관계가 아니라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이는 KBS가 확실한 노영방송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불법에 가까운 비정상적 노사합의를 속전속결로 단행한 이유가 무엇일까? 수신료 분리 징수로 가뜩이나 경영압박에 시달리고 있던 KBS는 특단의 정책적 조치가 없는 한 구조조정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또 난립하고 있는 공영 매체들을 재편하겠다는 현 정부의 정책 기조로 볼 때 향후 구조 개편, 아니 조직 슬림화가 이루어질 것임은 충분히 예상되는 일이다. 이번 협의 각서 서명은 표면적으로는 이런 상황에 대비해 안전장치를 마련해 놓자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이번 합의는 KBS 경영권을 장악하고 있는 언론노조 세력이 퇴각 직전 일종의 자폭장치를 심어 놓는 것 같은 느낌이다. 물러나면서까지 구조개혁을 방해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맥없이 퇴각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고용안정위원회라는 형태로 드러난 것이라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어쩌면 향후 언론노조 세력이 다시 부활할 수 있는 씨앗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이런 행위들은 언론노조가 결코 KBS의 진정한 주인이 아니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이다.

이 상황은 전투 사상자 대비 민간인 사상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던 6·25 전쟁을 연상케 한다. 전문가들은 그 이유를 동·서 진영이 처음으로 맞붙은 이데올로기 전쟁이라는 점에서 찾고 있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동족 간 전쟁이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민간인 사상자가 인민군 퇴각 직전 대규모 집단학살에 의해 발생했다. 퇴각 이후 상대방이 활용할 수 있는 인적 자원을 최소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무슨 군사작전처럼 노사 간에 합의된 이번 고용 관련 협약 역시 KBS를 장악하고 있던 언론노조의 퇴각 준비 행위로 보인다. 엄청난 내우외환 속에 공영방송 KBS의 정상화를 원한다면 자신들이 물러난 이후 KBS 개혁을 어떻게 무력화 아니 황폐화시킬 것인가를 고심할 게 아니라 반성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번 노사 협약은 언론노조가 장악하고 있는 KBS 경영진이 여전히 자신들의 생존에만 몰입해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지금 KBS의 상황은 얼핏 보면 여야·좌우 진영의 충돌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KBS를 완전히 몰락시키려는 세력과 KBS를 공영방송으로 새롭게 개혁하려는 세력 간의 싸움이 진행 중이다. KBS가 더 시급하게 정상화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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