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 연재소설
우리나라 삼국지 [319] 황산벌 전투 ④
관창의 시신을 말안장에 매달아서 신라 진영으로 보내라
임동주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4-29 06:30:20
 
 
전투에서는 기선 제압이 승패를 가름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제까지는 백제군이 여러 차례 방어에 성공함으로써 기세를 올렸다. 하지만 이번 일로 신라군의 사기가 오른다면 그들의 진격을 절대 막을 수 없었다.
계백은 반굴을 죽이고 돌아온 군사들에게 명령 불복종의 죄를 물어 태형에 처했다. 군법에 따르면 참수형이 마땅했지만 군사들의 동요를 우려해 죽이지는 않았다.
계백은 다른 신라 장수가 나타나면 죽이지 말고 생포하라 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라 진영에서 다른 장수가 말을 타고 달려 나왔다. 투구를 눌러 쓰고 갑옷을 입힌 말을 타고 손에는 창을 들고 있었다.
신라 장수는 벌판을 가로질러 영채로 다가오더니 시위라도 하듯이 목책을 따라 왔다 갔다 했다. 이는 명백한 도전 행위였다.
계백은 목책 밖으로 군사들을 내보냈다. 신라 장수의 도발이 백제군을 뒤흔들어 놓았다.
파도에 모습을 감춘 바위처럼 신라 장수는 어느새 백제 군사들에게 에워싸여 그 모습을 분간할 수 없게 됐다. 백제군이 원을 그리며 소용돌이쳤다.
신라 장수는 소용돌이를 빠져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창날이 반짝일 때마다 백제 군사가 쓰러졌다. 그러나 혼자서 많은 적을 상대하기는 어려웠다. 어딘가에서 날아온 밧줄이 신라 장수의 몸을 휘감더니 말 아래로 끌어 내렸다. 백제군의 창칼이 일제히 그를 겨누었다. 그는 일어나려 발버둥쳤지만 이미 완전히 제압당한 상태였다.
 
계백은 끌려온 신라 장수의 투구를 벗기도록 했다. 적장의 얼굴이 드러나자 장군은 놀라서 신음을 토해 냈다. 아직 솜털도 가시지 않은 소년이었다. 그는 기가 막혀서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어서 죽이시오.”
소년은 당돌하게 계백을 쏘아보며 외쳤다.
정녕 죽음이 두렵지 않으냐?”
계백은 소년의 얼굴을 살폈다.
두렵지 않소. 대장부로 태어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만큼 영광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소. 다만, 그대의 목을 베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뿐이오.”
계백은 당당한 소년의 모습을 보고 둘째 딸 운희를 떠올렸다. 차라리 전장에서 죽겠다던 딸의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하게 울려 퍼졌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나는 신라군 부장 관창(官昌)이오.”
계백은 유심히 관창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반듯한 이마와 가지런한 이목구비가 돋보이는 수려한 외모였다.
 
어찌 무모하게 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들었느냐?”
명을 받으면 따를 뿐이오. 어찌 이유를 논하겠소.”
이후로 관창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저 어서 죽이기만을 바라는 듯했다.
계백은 차마 관창을 죽일 수 없었다. 냉혹한 전쟁으로 말미암은 어린 생명의 희생은 자신의 아이들로 충분했다.
네 용기가 참으로 가상하다. 하지만 전장은 너처럼 어린아이가 있을 곳이 못 된다. 내 돌려보내 줄 테니 짐을 꾸려서 고향으로 돌아가라.”
장군은 소년을 돌려보냄으로써 딸을 죽인 죄를 씻고 싶었다. 그래야지 마음을 짓누르고 있는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을 듯했다.
자신을 돌려보낸다는 말에 관창은 죽기 전에는 돌아갈 수 없다고 버텼다. 계백은 군사들에게 소년을 끌고 나가게 했다. 그는 우악스러운 군사들의 손에 끌려 나갔다.
계백은 멀어져 가는 소년의 뒷모습을 보며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찡그린 눈가에 서 아픔이 묻어났다.
 
신라 진영으로 돌아온 관창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죽어야 할 자리에서 죽지 못하고 살아 돌아온 것은 장수로서 수치였다. 이 때문에 자신은 물론 가문마저도 씻을 수 없는 오욕을 뒤집어쓰게 된 것이었다.
부친인 품일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게 아들로서는 더욱 참기 어려웠다. 관창은 투구를 고쳐 쓰며 아버지에게 말했다.
제가 사로잡혔다 돌아온 것은 죽음을 두려워해서가 아닙니다. 이번에는 기필코 계백의 목을 베어 오겠습니다.”
관창은 차마 부친의 얼굴을 바로 보지 못하고 돌아서서 우물로 향했다. 진영을 만들면서 임시로 파 놓은 얕은 우물이었다. 그는 바가지로 물을 떠서 입가를 적셨다. 바싹 마른 입술이 다시 생기를 찾았다.
관창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말에 올랐다. 이번에는 절대 살아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는 주저 없이 말을 달렸다. 죽음보다 아버지를 실망하게 하는 게 더 두려웠다.
 
하지만 이번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관창은 분전했지만 또다시 백제군에게 사로잡혔다. 소년은 다시 계백 앞으로 끌려갔다.
계백은 답답하다는 얼굴로 관창을 쳐다봤다.
어찌 목숨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거냐?”
장군의 다정한 물음에 소년의 마음이 흔들렸다. 누군가에게서 걱정의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었던가? 품일은 밖에서는 유한 사람이란 소리를 들었지만 자식에게는 모질다 싶을 만큼 엄격했다. 그래서 평소에 다정한 말이라고는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소년의 어머니는 어릴 때 돌아갔기에 그에게는 오직 아버지뿐이었다.
관창은 어릴 때부터 과묵한 부친의 신임을 얻기 위해 애쓰며 살았다. 하지만 품일은 끝내 아들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심지어 죽으러 떠날 때조차 살가운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소년은 아버지에게 듣고 싶었던 말을 적장에게서 들으니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설움이 북받쳐 올랐다.
 
관창은 요동치는 감정을 다잡았다. 적장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것은 신라군의 명예에 먹칠하는 짓이었다.
패장에게는 죽음만이 있을 뿐이오. 더는 능욕하지 말고 죽이시오.”
관창은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큰 소리로 외쳤다.
내가 너를 살려 보낸 이유를 정녕 모른단 말이냐! 지금은 백제·신라·고구려로 나뉘어 싸우고 있지만 그 뿌리를 찾아보면 모두 한 조상의 자손이 아니겠느냐. 언제까지 형제끼리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계속하겠느냐. 머지않아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 그런 시대가 오면 너와 같은 젊은이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느냐.”
계백의 진심 어린 충고는 소년의 폐부를 찔렀다. 그러나 관창에게는 먼 훗날의 일보다 당장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지키고 신라 귀족의 명예를 감당하는 것이 중요했다.
긴말 필요 없소.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소.”
관창은 눈을 질끈 감았다. 더는 마음이 흔들리면 안 됐다.
소년의 의지가 이처럼 굳으니 만류할 방법이 없었다. 계백은 관창을 처형하라 명했다.
형장으로 끌려 나온 관창은 땅바닥에 무릎이 꿇려졌다. 군사 하나가 소년의 얼굴에 검은 천을 씌웠다. 날카로운 대도를 든 군사가 관창의 뒤에 섰다. 주변을 둥글게 에워싼 백제 군사들의 시선이 온통 소년에게 쏠렸다. 해가 중천에 올라 머리 위에서 내리쬐고 있었다.
 
참수했습니다.”
한 군사가 피가 뚝뚝 떨어지는 관창의 목을 계백에게 가져왔다. 그것을 본 순간, 장군은 살고 싶다고 도망치던 자식을 끝내 죽인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거세게 밀려왔다. 자기 자식 하나 보호하지 못하고 죽음으로 몰아넣은 아비의 참담함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한참을 괴로워하던 계백이 군사들에게 말했다.
관창의 시신을 말안장에 매달아서 신라 진영으로 보내라.”
장군은 자식을 잃은 아비의 심정을 생각해서 소년의 시신을 돌려보냈다.
 
관창의 시신이 신라 진영에 당도하자 유신을 비롯한 장수들은 비통한 심정을 가눌 수 없었다. 품일은 말안장에 걸린 아들의 머리를 끌어안으며 애써 오열을 참았다.
아이의 얼굴이 마치 살아 있는 것 같구나.”
관창의 눈은 여전히 뜨여 있었다. 품일은 그 눈빛이 자신을 원망하는 듯하여 고개를 돌렸다. 목에서 나온 피가 품일의 갑옷으로 흘러내렸다.
아버지가 아들의 머리를 잡고 울고 있는 장면은 참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신라군의 가슴속에서 불덩어리가 치밀어 올랐다. 이들의 분노는 곧바로 백제군에 대한 적개심으로 변모했다. 그 순간 신라군의 사기가 치솟았다. 금방이라도 도망칠 것 같았던 군사들이 어느새 일기당천의 용사로 변해 있었다.
신라군의 함성과 북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그들은 용기백배하여 일제히 황산벌을 가로질러 백제군의 영채로 달렸다.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놀라운 기세였다.
 
백제군은 목책을 넘으려는 신라군을 향해 활을 쏘았다. 많은 신라 군사가 쓰러졌지만 그들은 물러서지 않고 목책을 넘었다. 피가 튀고 뼈가 꺾이는 공방전이 끊이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자 신라군의 기세에 눌린 백제군이 차츰 밀렸다.
한순간에 목책이 무너져 내렸다. 뒤를 이어 신라 군사들이 먹이를 본 맹수처럼 달려들었다. 백제 군사들도 온 힘을 다했지만 죽기 살기로 달려드는 신라 군사를 막아낼 수는 없었다.
이제 내 할 일이 끝났구나.”
계백은 혼자 중얼거렸다. 그를 발견한 신라 군사들이 앞다투어 달려왔다.
장군은 창을 고쳐 잡았다. 그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 평온해 보였다. 승냥이처럼 달려드는 수많은 적을 앞에 두고도 마치 반가운 손님을 맞는 듯했다.
 
계백은 인사라도 하듯이 달려드는 적군의 공격을 피하며 창을 휘둘렀다. 신라 군사 서너 명이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이에 더 많은 군사가 그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장군은 하늘을 향해 비상(飛上)하듯이 말을 몰았다. 말발굽에 채인 군사들이 여기저기에 나뒹굴었다. 창날이 원을 그리며 달려드는 적군을 무찔렀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신장처럼 종횡무진인 계백에게 접근하기가 어려워지자 이번에는 궁수들이 나서서 일제히 활을 쐈다. 아무리 뛰어난 장수라도 수없이 쏟아지는 화살을 모두 피할 수는 없었다. 어깨와 다리에 화살이 꽂히자 계백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신라 군사들이 피 냄새를 맡은 이리 떼처럼 덮쳤다. 계백은 배와 다리에 창을 맞고 말에서 떨어졌다. 무수한 창칼이 그의 몸을 찌르고 베었다.
 
계백의 죽음을 본 백제 군사들은 악에 받쳐서 신라군을 상대했다. 하지만 전세가 기운 상태였기에 희생만 더 커질 뿐이었다. 충상과 상영은 이를 깨닫고 무기를 버린 후 항복했다. 그들의 휘하 장수도 뒤를 따랐다. 그런데 군사들은 이에 동조하지 않았다. 그들은 끝까지 신라 군사들을 물고 늘어졌다. 전투는 해가 서산으로 기울 때쯤에야 끝났다.
5천 결사대 중 살아남은 자는 항복한 20여 명의 장수뿐이었다. 나머지 군사들은 모두 목숨을 바쳐 백제인의 자존심을 지켰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추천해요
0
좋아요
0
감동이에요
0
화나요
0
슬퍼요
0
오늘자 스카이데일리
주요 섹션 기사
주소 : 서울특별시 중구 새문안로 26 청양빌딩 7층 | 전화 : 02-522-6595~6 | 팩스 : 02-522-6597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시 아01703, 등록일 : 2011년 7월 18일, 발행·편집인: 조정진, 편집국장: 고동석
copyrightⓒ2011, All rights reserved. Contact : skyedaily@skyedaily.com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박선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