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으로 쓰는 역사 [27] 처량하게 살아온 우리 민족을 연상케 하는 봉숭아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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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선왕이 불우하던 시기에 생겨난 봉숭아꽃 전설

스카이데일리 기자페이지 + 입력 2024-09-02 16:42:03

▲ 봉숭아꽃을 보면 어린 시절 손톱에 물을 들이던 장면이 연상된다. 윤상구 사진작가

봉숭아꽃을 보면 어린 시절 여름날 저녁, 손톱에 물을 들이던 장면이 떠오른다. 봉숭아 꽃잎과 이파리를 짓이겨 손톱 위에 올려놓은 후 잎이나 비닐로 둘러싸고 실로 동여매 주던 어머니의 모습도 그려진다.

손톱에 봉숭아 물을 들이는 풍습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에도 널리 퍼져 있다. 붉은색을 싫어하는 귀신을 물리친다는 속설 때문에 봉숭아 물을 들이는 행위는 단순한 치장을 넘어서 몸을 보호하려는 의도도 포함하고 있다.

봉선화는 봉숭아의 한자 이름

봉선화(鳳仙花)는 봉숭아의 한자 이름이다. 글자라고는 한자밖에 없던 고려 말기를 배경으로 한 봉숭아꽃 전설이 있다. 왕위를 빼앗기고 원나라로 끌려간 충선왕은 어느 날 이상한 꿈을 꾸었다. 고려 노래에 맞춰 가야금을 뜯는 궁녀의 손끝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 뒤 왕은 산책하다가 열 손가락을 모두 헝겊으로 꽁꽁 싸맨 궁녀를 발견헸다.

그녀는 고려에서 끌려온 공녀인데 고향이 그리워 날마다 고려 노래를 부르며 가야금을 연주하다가 손가락을 다쳤다고 했다. 그녀의 말에 감동한 충선왕은 반드시 고려로 돌아가겠다고 결심했다. 고려로 돌아와 다시 왕 자리에 오른 충선왕은 그 공녀를 찾으러 원나라로 사람을 보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충선왕은 그녀의 넋을 기리며 궁궐 뜰에 봉숭아를 심었다고 한다. 피 흐르는 손끝과 봉숭아를 연관 지은 것으로 보아 그때도 손톱에 봉숭아 물들이는 풍습이 있었던 것 같다.

제26대 충선왕은 충렬왕과 원나라 제국대장공주의 아들이며 황제 쿠빌라이의 외손자이다. 충선왕은 아버지를 몰아내고 고려 왕이 되었지만 5개월 만에 왕위에서 쫓겨났다. 그가 고려 여자 조비를 가까이하자 질투를 느낀 왕비 계국대장공주가 원나라 조정에 이를 고자질한 것이다. 원나라는 충선왕으로부터 국왕의 인을 빼앗아 충렬왕에게 돌려주었다.

개혁을 시도하다가 쫓겨난 충선왕

▲ 가곡 ‘봉선화’에는 일제시대를 살았던 민족의 애환이 담겨 있다. 윤상구 사진작가

충선왕이 왕위를 빼앗긴 배경에는 가정사 외에도 다른 요인이 있었던 듯하다. 충선왕은 즉위하자마자 고려 사회에 널리 퍼져 있던 여러 폐단을 개혁하겠다고 선언했다. 전면적인 관제 개편도 하고 부패의 온상이 되었던 정방을 폐지했으며 원나라식으로 바꿨던 관직 등을 이전으로 되돌리며 고려 전통을 회복시키려 했다. 이런 움직임은 기득권층의 불만을 불러일으켰고 원나라에도 위협적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충렬왕이 복위하고 충선왕은 원나라로 불려갔다. 봉선화 전설은 이처럼 충선왕이 불우했던 시기를 배경으로 생겨났다. 1307년 원나라 황제 성종이 세상을 떠나고 황제 자리다툼이 일어났는데 그때 충선왕의 중재로 무종이 황제에 오를 수 있었다. 그 공으로 충선왕은 막강한 권력을 쥐게 되었고 고려 왕 자리도 되찾았다.

충선왕은 다시 개혁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 의지는 오래가지 못했다. 기득권층의 저항이 강한 데다 충선왕 자신도 정치에 싫증을 느꼈기 때문이다. 충선왕은 재위 기간 대부분을 원나라 선양에서 지내며 고려를 다스렸다. 고려 대신들이 왕의 귀국을 계속 요구하고 새 황제 인종도 귀국을 종용하자 충선왕은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이때 충선왕의 나이는 38세, 새로 왕이 된 충숙왕은 19세였다. 이후에도 충선왕은 원나라에 살면서 고려 정치에 깊이 관여했다. 관리 임면권이나 왕실 창고의 출납 권한도 충선왕이 가지고 있었다. 충선왕은 원나라 정계에서도 큰 활약을 펼쳤다. 과거 시험을 치러 인재를 뽑게 하고 만권당이라는 개인 연구소를 세워 당대 최고의 학자들과 교류했다.

처량한 신세의 백성을 상징하는 봉숭아꽃

그런데 인종이 죽고 뒤를 이은 영종은 충선왕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고려 왕이 아니면서 고려에도 권력을 행사하고 원나라 대신이 아니면서 원나라 조정 일에 간섭했기 때문이다. 충선왕은 원나라 환관의 모함으로 머리가 깎여 석불사라는 절에 갇혔다가 다시 옌징에서 1만5000리나 떨어진 티베트 사스카야에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충선왕은 “독기로 가득 찬, 못 살 곳이란 말은 예부터 들은 바이나 옌징을 떠나 몇만 리나 걸어왔던고”라고 하소연하는 편지를 아들 충숙왕에게 보내기도 했다. 얼마 후 사면을 받았지만 충선왕은 끝내 고려로 돌아오지 못했다. 귀양에서 풀려난 지 2년 만에 선양에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울 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로 시작되는 김형준 작사·홍난파 작곡의 가곡 ‘봉선화’에는 일제시대를 살았던 민족의 애환이 담겨 있다고 한다. 봉숭아꽃 전설과 관련된 원 간섭기를 살펴보면 백성을 상징하는 봉숭아꽃이 처량하게 보인다는 데 깊이 공감하게 된다.

30년 가까이 계속된 몽골의 침략에 백성들의 삶은 이미 심하게 피폐해졌을 텐데 그 뒤를 이은 원 간섭기 약 100년 동안 여섯 명의 왕이 열 번이나 왕 자리에서 오르락내리락할 정도로 정국이 엉망진창이었으니 말이다. 이래저래 그 고운 봉숭아꽃은 처량하게 살아온 우리 조상을 상징하는 서글픈 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글 황인희 사진 윤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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