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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아침, 외눈박이가 된 당 태종이 수하 장수들을 불러 모았다. 그는 한쪽만 남은 눈을 껌벅이며 한참 만에 처량하게 입을 열었다.
“이제 보니 이곳이 사지(死地)였구나. 모든 장군은 휘하 군사들을 이끌고 퇴각하라. 요하를 건너 요택으로 나아갈 것이다.”
고구려의 추격군을 두려워해서 굳이 요택으로 가겠다는 것을 반대할 명분이 없었기에 모든 장군이 복명하고 철수를 준비했다.
장손무기는 총관들을 불러 놓고 일일이 주의를 환기했다. 철군은 맞서 싸우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당군은 대오를 정연하게 유지하며 후퇴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무사히 임유관을 넘을 수 있을지는 오직 하늘만이 아는 일이었다.
당군이 철수한다는 소식에 고정의는 즉각 부하 장수들을 소집해서 명을 내렸다.
“당주 이세민이 양만춘 장군이 쏜 화살에 맞아 한 쪽 눈을 잃었다 하오. 그래서 저들이 철군할 수밖에 없는 거요. 이제부터 당군을 추격해야 하오. 누성달 장군은 기병 3만을 이끌고 나와 함께 선두에 섭시다. 온수문 장군은 보병 3만을 거느리고 우리의 뒤를 따르시오. 강삼덕 장군은 병차에 건량과 보급품을 싣고 후미에서 따라오시오.”
“어디까지 추격합니까?”
누성달의 물음에 고정의가 대답했다.
“요하 동안(東岸)까지 가서 대막리지의 명을 기다릴 것이오. 자, 서두릅시다.”
고정의는 누성달과 함께 경기병을 이끌고 먼저 떠났다. 그 뒤를 온수문이 따랐다.
한 식경쯤 진군했을 때 고정의는 당군과 싸우고 있는 고구려군을 목격했다. 그들은 양만춘이 이끄는 안시성의 군사였다.
고정의는 반갑게 양만춘에게 다가갔다.
“이세민이 외눈깔이 됐다는 소문이 파다하더이다. 대단한 공을 세우셨소.”
안시성주는 겸손하게 대답했다.
“대단한 일도 아닙니다. 아직 이세민이 목숨을 보전하고 있으니 쫓아가 수급을 베어야지요.”
“지금까지 안시성을 사수하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소. 이제 좀 쉬시오. 우리가 추격해서 당주의 목을 베어 오겠소.”
하지만 양만춘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고정의는 할 수 없이 그와 동행하기로 했다.
요하에 도착한 당 태종은 지난날 결의를 다지기 위해 뗏목과 부교를 모두 불살랐던 일을 후회했다. 그는 장손무기를 불러 도하에 관해 의논했다.
장손무기가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제가 이런 일에 대비해 장량을 시켜 뗏목과 부교를 준비시켜 놨습니다. 하루 정도면 모두 도하할 수 있을 겁니다.”
당군이 패하여 도망칠 것을 예견했다고 말하면서 장량까지 들먹이자 당 태종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모두가 자신을 위한 배려라 생각하고 참기로 했다. 어떻든 간에 부교가 준비되었기에 무사히 요하를 건널 수 있었다.
후미에서 고구려의 추격군을 상대해야 했던 이세적은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도망치다가 뒤돌아서서 싸우기를 하루에도 수차례나 반복했다. 이 와중에 고구려군이 쏜 화살에 많은 장졸이 죽어 나갔다. 천신만고 끝에 요하에 이르렀을 때는 5만의 군사 중 절반을 잃은 상태였다.
이세적은 차가운 건량으로 속을 채우며 고구려군에게 쫓겨야 하는 자신의 신세가 새삼 한심했다. 하지만 한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기운을 내서 강변을 살펴보니 5개의 부교 중 멀쩡한 곳은 한군데밖에 없었고 배도 몇 척 남아 있지 않았다. 시간을 벌기 위한 장손무기의 짓이었다. 기가 막혔지만 모두가 태종을 지키기 위한 고육책이라 생각하고 참았다.
어느새 뒤따라 온 고구려군은 활을 쏘아대며 진격해 왔다. 똥줄이 탄 당나라 군사들은 서로 먼저 부교를 건너겠다고 아귀다툼을 벌였다.
보다 못한 이세적이 칼을 높이 들고 외쳤다.
“여기서 나만 살겠다고 다투면 전부 죽는다. 그러니 도망치지 말고 고구려군에 맞서 싸워라. 부교를 건널 순서는 내가 정해 주겠다.”
당군은 진정하고 돌아서서 고구려군에 맞설 태세를 갖췄다.
연이어 들이닥친 고구려군은 백병전을 벌이지 않고 부교를 중심으로 반원으로 포진한 채 각궁을 쏘아댔다. 강변에 밀집해 있던 당군들은 무더기로 쓰러졌다. 당군의 대오가 무너져 내리자 부장은 황급히 이세적을 부교 쪽으로 밀어붙였다. 상황을 돌이킬 수 없다고 판단한 대총관은 부장이 고구려군을 막고 있는 사이 부교에 올라탔다.
우두머리가 달아나자 당군은 한순간에 오합지졸로 변했다. 그나마 싸우던 자들도 등을 보이고 달아났다. 이들은 저 혼자 살겠다고 다투며 부교에 올랐다. 갑자기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몰리니 부교는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가라앉았다. 도망갈 길이 끊긴 당나라 군사들은 추격군의 창칼 아래 고꾸라졌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자 요하는 당군이 흘린 피로 붉게 물들었다.
한편 요택으로 들어선 당 태종은 진창 때문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말과 수레가 진흙에 빠져 허우적대자 군사들은 이를 끌어내기 위해 뛰어들었다. 하지만 진창은 어느덧 수렁으로 변해 모든 것을 빨아들였다. 곳곳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기에 당군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그렇게 며칠이 흐르자 태종은 속이 탔다. 고구려의 추격병이 언제 당도할지 모르는 마당에 마냥 시간을 허비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조바심을 치다 보니 다친 눈이 더욱 아팠다. 게다가 축축한 진창 속에 오래 있었더니 등에 종기까지 나서 괴로움이 더했다.
군사들의 상태도 하루가 다르게 나빠졌다. 습도가 높은 곳에서 허기와 추위에 허덕이다 보니 돌림병이 발생하고, 탈진하여 쓰러지는 자가 속출했다.
당 태종은 절망에 빠져 만사를 포기하고 싶었지만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장병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남은 이들을 데리고 장안으로 돌아가야 했다.
태종은 몸소 팔을 걷어붙이고 수렁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군사들과 함께 풀을 베어 길을 메우고 다리를 만들어 수렁이 깊은 곳에 놓았다. 당 태종이 나서서 솔선수범하자 자포자기하여 손을 놓고 있던 군사들도 힘을 내서 길을 닦아 나갔다.
천신만고 끝에 당군은 요택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당 태종은 지칠 대로 지친 군사들을 독려해 서남쪽 해안 길로 접어들었다. 고구려군의 추격을 피하고자 새로운 길을 택한 것이었다.
연개소문은 5만의 군사를 이끌고 대릉하를 건너 임유관으로 가는 길목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당군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사흘이 지났을 때 척후병이 헐레벌떡 뛰어와 고했다.
“당군이 해안 길을 따라 임유관으로 가고 있습니다.”
연개소문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내가 잘못 짚었구나. 도적들이 해안 길을 이용해 도망칠 줄이야. 당장 쫓아가야겠다. 이번에는 기필코 이세민을 잡아야 한다.”
대막리지의 명이 떨어지자 고구려군은 단숨에 떠날 준비를 끝냈다.
고구려군은 이틀을 쉬지 않고 달렸다. 그리고 어느덧 도망치는 당군을 따라잡았다. 연개소문은 쾌재를 부르며 군사들을 휘몰아 덮쳐 갔다.
당군은 고구려군이 내지르는 함성에 놀라 가던 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고구려 군사들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달려오고 있었다. 놀란 당나라 군사들은 병장기를 버리고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다.
연개소문은 졸개들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태종을 잡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가득했다. 그가 당나라 군사들을 헤치고 들어가니 불과 한 마장 앞에 당 태종의 깃발이 휘날리는 수레가 보였다.
대막리지는 부하들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저 수레에 이세민이 타고 있다! 절대 놓치지 마라!”
연개소문은 수십 기의 군사들과 함께 태종의 수레를 쫓았다. 주위에서 시종하고 있던 당군들은 고구려군의 기세에 놀라 수레를 버리고 도망쳤다. 마침내 고구려 군사들이 태종이 탄 수레를 에워쌌다.
연개소문이 우렁차게 소리쳤다.
“당장 나와 오라를 받아라!”
수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대막리지는 군사를 시켜 수레를 부수고 당 태종을 끌어내리게 했다. 그런데 끌려 나온 사람은 태종이 아니라 호종하던 환관이었다. 적의 계책에 보기 좋게 속아 넘어간 것이었다.
연개소문은 전신의 맥이 풀렸다. 이곳에서 지체하는 사이 태종은 벌써 멀리 도망갔을 터였다.
고구려의 기병들이 속속 도착했다. 연개소문은 다시 기운을 내서 당군을 뒤쫓았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당장 설인귀가 길을 막고 있었다. 당 태종에게 도망갈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해 나선 것이었다.
고구려군이 설인귀 부대에 발목이 잡혀 있는 동안 당 태종은 임유관을 지나 장안으로 향하고 있었다.
연개소문이 임유관 앞에 진을 치고 있자니 고정의와 양만춘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합류했다.
안시성주 양만춘이 대막리지에게 급히 아뢰었다.
“당군은 황급히 도망치느라 경황이 없을 겁니다. 이번 기회에 임유관을 넘어 탁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고정의가 임유관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군사는 매우 피로한 상태입니다. 더구나 원정에 나서려면 보급이 원활해야 하는데 당장 준비하기 어렵습니다. 일단 유성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연개소문도 성질 같아서는 당장 만리장성을 넘어 장안을 치고 싶었지만 고정의의 말이 옳았기에 참았다. 그는 전군에 회군하라는 명을 내렸다.
고구려군은 포로로 잡은 당군을 끌고 개선가를 부르며 유성으로 되돌아왔다.
연개소문은 이틀을 푹 쉬고 요동으로 건너가 백성을 위로한 후 평양으로 귀환했다.
제1차 고당 전쟁은 고구려의 압승으로 끝났다. 당군은 이 전쟁에서 정병만 35만을 잃었고, 막대한 치중(輜重·탄약·식량·장막·피복 등 군대의 여러 물품)을 고구려군에게 빼앗겼다. 이 외에도 죽거나 포로로 잡힌 인부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에 비하면 고구려의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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