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문형의 만사만감(萬事萬感)] 혈연 선택과 ‘마처세대’의 부모 선택 딜레마

이 시간 주요기사

뉴스 > 연재기획

최문형 필진페이지 + 입력 2024-11-15 06:30:28

동물의 한살이는 인간보다 단순하다. 유전자에 각인된 본능을 따르고 모든 생명체의 임무인 생존과 번식에 충실하다. 생존과 번식을 수행하기 위해 때론 경쟁하고 때론 협동한다. 사자의 경우 짝짓기를 위한 수컷의 치열한 전투 속에서 형제의 연대를 볼 수 있다. 신기한 일이다. 다른 수컷이 이끄는 암컷 무리를 접수하기 위해 둘이나 셋, 심지어 네 마리의 형제가 연합하기도 한다. 아무리 뛰어난 수컷이라도 4형제의 투합을 당해 내긴 어렵다.

암컷도 서로 돕는다. 그들은 새끼 양육을 품앗이하고 공동의 홈스쿨링을 통하여 자식을 가르치고 사회화한다. 사냥도 협동 작전을 쓴다. 무리를 이룬 동물은 피를 나눈 개체들이다. 그들은 함께 지내면서 먹이를 찾아내고 포식자를 경계한다.

동물학자들은 기이한 장면을 목격하기도 한다. 가젤 한 무리가 이동하는데 그중 젊은 가젤 한 마리가 곧장 앞으로 뛰지 않고 위로 솟으면서 가는 것이다. 도약하면서 달려가는 가젤을 느낀 다른 개체들은 평소보다 속력을 내서 달리기 시작한다. 동물학자들이 주의를 기울이면 근처에 포식자가 접근한 것을 알 수 있다.

젊은 가젤은 포식자의 접근을 ‘경계’하라는 신호를 보내느라 ‘도약’하면서 달린 것이다. 학자들은 이를 ‘경계 도약’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 젊은 가젤은 조심조심 다가오는 포식자를 민감하게 알아챘다. 그러고는 “도망쳐!”라는 신호를 몸으로 보내는 중이다. 그의 생존만 놓고 본다면 이 경계 도약은 위험할 수 있다. 위로 솟구치면서 달리면 속도가 늦어지고 무리의 후미로 처진다. 포식자의 포획 상대가 될 가능성이 커진다. 그럼에도 왜 이 개체는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무리를 위해 도약하는 것일까.

답은 유전자이다. 경계 도약한 개체가 포식자의 먹이가 된다고 해도 그와 유전자를 공유한 혈연공동체의 개체들은 살아남는다. 개체 입장으로 보면 희생이지만 유전자 입장에서 보면 그렇지 않다. 각각의 개체들은 희생자와 50%·25%·12.5% 등등의 비율로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새들도 마찬가지다. 맹금류가 침입하면 ‘경계음’을 내어 신호를 준다. 큰 소리를 내는 개체는 자신은 생존에 불리하지만 근처에 사는 혈연들에게는 적응도를 높여 유전자를 보존하게 해 준다.

이러한 이타성을 과학자들은 ‘혈연 선택’이라고 했다. 인간의 혈연 선택 이타성은 진화와 문명의 발전을 추동시킨 거대한 힘이다. 생명이 만들어지는 신비를 터득한 날로부터 인간은 혈연의 중요함을 알았고, 이를 잘 보존하고 계승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피가 섞이지 않은 개체들 간의 이타성과 상호 계약 또한 혈연의 보존을 위해 이루어졌다.

역사와 문명의 발전도 혈연 선택을 주축으로 이루어졌다. 혈연은 확대 가족이 되었으며 혈연과 혈족이 확장되어 만들어진 가장 뚜렷하고 옹골찬 공동체가 바로 ‘민족’이다. 부족들이 연합한 민족은 경계선을 뚜렷이 한 채로 방어와 정복을 통한 공격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처럼 진화 과정에서 인간의 뇌는 선택과 결정에서 ‘혈연’을 최우선으로 두면서 생존을 도모했다. 그리하여 가족은 가장 신성하고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었다.

정보화시대의 가족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조각조각 파편화되어 혈연의 중요성이 희석되는 중이다. 부모의 헌신과 희생은 한편으론 당연시되고 한편으론 방기된다. 당연시는 무시로 이어지고 방기는 무책임으로 나타난다. 동물이 본능적으로 하는 새끼 양육을 기피하는 부모 개체가 있고, 까마귀도 한다는 보은을 나몰라라 하는 자녀 개체도 있다. 심지어 서로 간에 원망과 불신과 미움이 팽배하기도 한다.

베이비붐 세대를 다른 말로 ‘마처세대’라고 하는데 부모를 봉양하는 마지막 세대이면서 자녀로부터 돌봄을 받지 못하는 처음 세대라는 뜻이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 끼인 마처세대는 향방을 잡기 어려워 방황한다. 특히 자녀와의 관계가 어렵다. 서로가 서로에게 자녀와 느슨하게 지내라고 충고는 하는데, 얼마나 ‘느슨하게’ 지내야 하는지가 숙제다.

새끼가 혼자서 생존 가능하다고 판단되면 한순간 양육을 끝내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 버리는 동물의 어미와 달리 인간은 끝나지 않을 지원과 보호를 자청한다. 그 부작용으로 영원히 부모를 의지하는 캥거루형 자녀가 속출하기도 한다.

자연은 모든 생명체에게 순간순간 선택과 결정을 요구한다. 진화는 선택과 결정의 산물이다. 생명체로서의 인간도 그렇다. 우리의 운명은 어디에도 미리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단지 흐르는 자연 속에서 초·분 단위의 선택이 요구될 뿐이다. 혈연과 가족 속에서 부모와 자녀의 관계도 그러하다. 우리 각자는 주체적 존재로서 선택이라는 열쇠를 쥐고 있다. 문득 구약성서의 ‘부친 축복권’이 떠오른다.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이삭이 야곱에게 임종 자리에서 온 힘을 다해 복을 빌었던 기도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자연 선택의 최고봉은 혈연 선택이며 혈연 선택의 정수는 부모 선택이라는 진리를 가르쳐 주는 게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