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나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201] 놓쳐 버린 사랑이 더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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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담한 실패의 증거는 아니라 해도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10-30 06:20:51

“그래. 당신이 사랑하는 건 오직, ‘당신’ 뿐이지.”

아내가 코웃음까지 곁들여 나를 조소했다. 그녀가 옳았다. 널 먹고 싶어, 하운을 희롱한 혓바닥으로 스물네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서 아내 앞에 무릎 꿇고 당신 없으면 안 된다고, 내가 사랑하는 건 당신뿐이라고 항변하는 나란 놈은 얼마나 파렴치하고 가증스러운 녀석이란 말인가. 나는 나를, 나의 불안을, 나의 어둠을, 나의 분열과 나의 가증을 연민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어떤 분노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터져 나오려 했다. 나는 아내를 사랑한 게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날 버렸기 때문에 내 인생을 지배했던 어머니처럼, 날 떠났기 때문에 온통 아내에게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붙잡으려는 것이다. 나를 버렸으므로 하운도 애틋한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도 자신의 욕망을 따랐다. 하운도 자신의 마음을 따랐다. 아내는 다른가. 이토록 나를 비난할 자격이 있는 것일까. 나를 천하의 나쁜 놈으로 취급하고 있지만, 아내는 억울하고 가여운 피해자일 뿐인가.

“당신은 달라? 당신도 당신만 사랑했던 거잖아. 당신의 잘못된 선택을 바로잡으려고, 기회가 오자마자 서둘러서 떠난 거잖아. 내 아이들까지 데리고 달봉이 녀석 품으로 달아난 거잖아!”

나는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아내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나는 멈추지 않았다. 떠나 버린 아내가 내게 준 충격은 유리가 던진 폭탄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나는 유리의 피해자였으므로 얼마든지 내 슬픔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세상의 연민이라도 받을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 끝내 극복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이혼은 달랐다. 아무리 미사여구를 갖다 붙여도 이혼은 참담한 실패의 증거였다. 내가 버림받았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그러나 아내에게 나는 가해자일 수밖에 없었고 아이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죄인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붙잡고 매달릴 수조차 없었다.

“당신은 언제나 내게 바라기만 했어. 먼저 마음을 헤아려 주길, 먼저 사랑해 주길, 먼저 만져 주길. 다른 마누라들처럼 악다구니 쓰면서 당신이 원하는 걸 말해본 적 없잖아. 내가 뭘 원하는지 물어본 적 없잖아. 힘들 때 한 번이라도 왜 그러냐고 다그쳐 봤어? 내 마음을 솔직하게 내보일 수 있도록 편하게 해 준 적 있냐고? 또 서운해 하는구나, 또 잘못 말했구나, 나에게 뭘 말하려는 걸까, 늘 추측하고 늘 조심하고 늘 긴장해야 했어. 말하지 않는데 당신이 뭘 원하는지 어떻게 알아? 당신이 묻지 않는데 내가 뭘 원하는지 어떻게 말하냐고? 내가 몰라 준다고 불만만 쌓여서 당신도 결국 날 원망하며 달아난 거잖아!”

아내 앞에서 감정을 드러내며 이렇게 많은 말을 쏟아 놓은 건 처음이었다. 아내의 검은 눈이 당혹스러움으로 두 배는 더 커진 것 같았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아내는 변명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대신 떨리는 손으로 가방을 뒤졌다.

“이거 주려고 왔어.”

아내가 통장과 도장을 꺼내 내밀었다.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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