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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실은 태후의 처소로 가서 거사의 성공을 알리고 후사를 논의했다. 국왕 세력이 반기를 들지 못하도록 빠른 조치가 필요했다. 두 여인은 동륜의 아들인 백정(白淨)을 추대하기로 했다.
태후는 당장 대신들을 소집하여 국왕을 폐위하고 백정으로 후사를 잇는다고 선포했다. 국왕의 행방이 묘연한 마당에 왕실의 최고 결정권자인 태후가 내린 명이었기에 대신들은 반대할 수 없었다. 더구나 좌우에서 설원랑의 낭도들이 창칼을 들고 노려보고 있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태후는 이찬 노리부(弩里父)에게 일러 새로운 왕의 옹립을 준비하도록 했다.
이찬은 명을 받자마자 일말의 지체도 없이 어린 백정을 왕으로 옹립했다. 이가 바로 신라 제26대 임금인 진평왕(眞平王)이다.
진평왕은 나이가 어렸기에 미실이 조정의 일을 마음대로 주물렀다. 이제 신라 왕실과 조정은 그녀의 수중에 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산적한 나랏일에 관여하느라 바쁜 하루를 보내고 처소로 돌아온 미실은 멍하니 침상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자신이 바라던 것을 이루었지만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권력의 정점에 섰다 해서 사다함이 살아 돌아오지도 않았고, 행복했던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미실은 모든 것이 허망하게 느껴졌다. 과연 무엇을 위해 수많은 사람의 피를 보며 여기까지 달려온 걸까? 어둠과 싸우던 등잔불이 애처롭게 흔들렸다. 이때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이용만 하다가 버린 세종이었다. 돌이켜보면 그는 아무런 사심 없이 미실에게 헌신했다. 매번 속으면서도 그녀를 책망하기는커녕 따뜻하게 감싸 주었다.
미실은 증오와 고통에서 벗어난 후에야 비로소 세종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었다. 사다함과의 사랑이 순식간에 타 버린 모닥불 같은 것이었다면 세종의 사랑은 은근하게 온기를 유지하는 화롯불과 같았다. 그녀는 다음 날 당장 세종을 만나러 가겠다고 결심했다.
미실이 궁을 떠나 세종과 함께 은둔하자 진평왕의 모후인 만호 부인이 섭정 자리에 올랐다. 그녀는 이찬 노리부를 상대등으로 임명하여 정사를 돌보게 했다. 전임자인 거칠부는 진지왕이 죽자 스스로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낙향했다.
상대등 노리부는 세상 이치에 밝고 경험이 풍부한 인물이었다. 그는 신라의 관제를 정비하고 관리를 감독하는 위화부(位和府) 등의 관부를 신설했다. 각처마다 능력 있는 관리를 등용하여 조정의 내실을 다졌다. 신라는 외적인 팽창뿐 아니라 내적인 개혁도 게을리하지 않아 점차 안정을 되찾아 갔다.
서력 590년, 고구려에서는 평원왕이 타계하고, 그의 장자인 원(元)이 등극했다. 이가 바로 고구려 제26대 임금인 영양왕(嬰陽王)이다. 그는 풍신이 준수하고 호방하며, 천하를 제패할 원대한 포부를 품고 있는 인물이었다.
영양왕은 내치에 힘써 백성을 안돈시키고 널리 인재를 모아 적재적소에 활용함으로써 강성한 나라를 만들어 갔다.
영양왕이 신하들과 정사를 논의하고 있을 때였다. 대형(大兄) 온달이 나서서 아뢰었다.
“신라가 망령되이 우리의 영토인 죽령(竹嶺) 이북의 땅을 빼앗아 저들의 군현으로 삼은 지도 수십 년이 지났습니다. 그곳의 백성은 아직도 이를 원통하게 여기고 있다 합니다. 소신에게 군사를 내어 주신다면 반드시 그 땅을 되찾아 오겠습니다.”
영양왕은 매부 온달의 결의에 찬 모습이 믿음직스러웠다. 이제껏 싸움에 나가 물러선 적이 없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장수가 아닌가. 특히 선왕 시절 나라의 명운을 건 북주와의 전쟁에서 적장 우문롱을 사로잡아 아군을 승리로 이끈 일은 고구려 무사들 사이에서 두고두고 회자되곤 했다. 그라면 죽령 이북의 영토를 수복하고도 남으리라.
여기서 말하는 죽령 이북은 소백산맥 북쪽, 한수 유역의 광활한 땅을 말했다. 장수왕 이후로 고구려 땅이었지만 이 당시 신라가 차지하고 있었다.
영양왕은 온달의 기개에 매우 흡족해서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장하도다! 그대의 기상이 하늘을 찌르고도 남는구나. 짐이 3만의 군사를 내어 줄 테니 반드시 승전보를 전하도록 하라.”
“그 땅을 되찾지 못한다면 절대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온달의 비장한 결의는 영양왕과 대신들을 숙연하게 했다.
그날 밤, 온달은 평강과 마주 앉았다.
“내가 다녀올 동안 집안을 부탁하오. 내 반드시 신라를 응징하고 죽령 이북 땅을 되찾아 고구려의 이름을 만천하에 드날리겠소.”
공주는 웬일인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원정을 떠나는 낭군 앞에서 상서롭지 못한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집안일은 걱정하지 마시고 부디 몸조심하세요.”
공주의 흔들리는 눈빛이 온달에게서 떠날 줄 몰랐다.
며칠 후, 도성 밖에 집결한 온달의 군대는 일제히 기치를 휘날리며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동안 많은 전장에서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오추마 위에 걸터앉은 장군의 위용에 구경 나온 백성은 찬탄을 쏟아 냈다. 진군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온 들녘을 가득 메웠다.
남진을 거듭한 온달의 군대는 파죽지세로 포천의 고모루성(古牟婁城)을 거쳐 아단성(阿旦城)으로 나아갔다. 아단성은 신라의 소경인 국원성의 전초 기지였다. 만일 이곳을 점령한다면 국원성도 쉽게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한수에 주둔하고 있는 신라군은 고립무원의 처지에 빠지게 될 것이었다.
온달은 직접 선발한 날랜 군사들과 함께 쉬지 않고 달려 아단성에 이르렀다. 갑작스러운 고구려군의 출현에 성을 지키던 신라 군사들은 허겁지겁 성문을 걸어 잠갔다. 성주는 국원성으로 전령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아단성은 가파른 산비탈에 석축을 세우고 그 위에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성으로 방어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으나 공격하는 쪽에서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온달은 궁수 부대를 앞세워 기선 제압에 나섰다. 휘파람새 떼가 한꺼번에 날아오르는 듯한 파공음이 숲속의 나무들을 흔들어 놓았다. 고구려군이 날린 화살을 맞고 쓰러지는 신라 군사들의 비명이 메아리쳤다.
성벽에서 많은 사상자가 속출했지만 아단성주 대명(大明)은 결코 물러설 수 없었다. 이제까지 수많은 군사가 피를 흘려 차지한 이 성을 쉽게 내줄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구원군이 올 때까지 성을 사수해야 했다.
대명은 거칠부를 따라다니며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장수였다. 특히 활을 잘 쏘았는데 그 솜씨가 어찌나 걸출한지 모든 사람이 그를 신라 제일의 신궁으로 추앙했다. 거칠부는 그의 재주를 아껴서 항상 옆에서 보좌토록 했다.
대명은 한때 국원에 머물며 북변을 통괄하는 책임을 지기도 했다. 하지만 진평왕이 즉위하고 거칠부가 실권(失權)하게 되자 일선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 노리부가 상대등이 되자 대명을 중용하여 아단성의 성주로 삼은 것이다. 조정으로부터 명을 받은 대명은 아무 말 없이 국원을 떠나 아단성으로 향했다.
온달은 공성전에 대비해 훈련시킨 별동대를 내보냈다. 그들은 기동성을 높이기 위해 쇠를 얇게 펴서 만든 가벼운 갑옷과 투구를 쓰고 근거리 전투에 적합한 단창과 도끼를 들고 있었다.
그동안 모진 훈련을 거친 별동대의 날카로운 눈이 성벽을 뚫어져라 노려봤다. 온달의 명이 떨어지자 그들은 일제히 성벽으로 뛰어가서 사다리를 놓고 올랐다. 마치 시체 위에 달라붙은 까마귀 떼처럼 성벽을 새까맣게 수놓았다.
야차처럼 달려드는 고구려 군사들의 기세에 신라군은 기가 질리고 말았다.
부하들이 넋을 놓고 있자 대명이 큰소리를 질러 일깨웠다.
“살고자 하는 마음을 버려라! 이 성에서 뼈를 묻을 각오로 싸워라!”
성주의 비장한 외침에 아단성 군사들은 정신을 차렸다. 그들은 악착같이 성벽으로 오르는 고구려군을 향해 화살을 쏘고 돌을 날렸다. 그리고 긴 창을 이용해 가까이 다가선 고구려군을 찌르고, 성벽에 걸친 사다리를 밀어냈다.
고구려 군사들이 이를 악물고 공격하는 만큼 신라 군사들 역시 온 힘을 다해 맞섰다. 그렇게 몇 시간에 걸쳐 피를 뿌리는 사투가 벌어졌다. 양편 군사들이 흘린 피가 바람에 날려 부슬비처럼 내렸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자 온달은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신라의 구원군이 당도하기 전에 성을 차지 못하면 오히려 적군에게 협공당할 수도 있었다. 보급로가 길어지는 원정에서는 속전속결만이 승리할 방법이었다.
온달은 성안에 뛰어난 장수가 있다고 추측했다. 그렇다면 별동대에게만 맡겨 놓을 수는 없었다. 그는 전군에 공격 명령을 내린 후에 군사들을 진두지휘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온달이 탄 오추마가 발굽이 땅에 박힌 듯 꼼짝하지 않았다. 십수 년을 전장에서 한 몸처럼 누비고 다녔지만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이는 분명 상서롭지 않은 징조였다.
순간 온달의 마음속에 불안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다급한 상황에 말 때문에 지체할 수는 없었다. 그는 수하에게 명해 다른 말을 끌고 오게 했다.
온달이 말을 바꿔 타고 뛰어나가자 오추마는 하늘을 향해 목을 쳐들고 구슬프게 울었다. 말의 눈가에 물기가 맺힌 듯했다.
성의 보루에 서 있던 대명은 고구려군의 선두에 서서 다가오고 있는 온달을 발견했다.
이때 부장이 뛰어와 성주에게 아뢰었다.
“고구려의 중군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대로 버티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군사의 태반이 이미 목숨을 잃었고 부상자도 많습니다.”
대명은 보고를 들으면서도 저 멀리 온달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저자가 바로 고구려 장군 온달이구나. 내 비록 직접 만나 보지는 못했지만 요서를 발아래 둔 호랑이 같은 장수라는 소문은 익히 들었다. 과연 헛소문이 아니구나.”
성주는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경의를 표했다.
부장이 황망히 상기시킨다.
“지금 적장을 칭찬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상황이 매우 나쁩니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대명은 냉정함을 되찾고 시종하는 군사에게 명했다.
“내 활을 가져오너라. 머리를 자르면 몸통은 자연히 고꾸라지기 마련이다.”
활과 화살을 받아든 대명은 신중하게 적장을 조준했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는 가볍게 활을 쐈다. 시위를 떠난 화살은 도끼가 장작에 내리꽂히듯 온달의 인중에 정확히 박혔다. 그는 외마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말에서 떨어졌다.
온달은 어린 시절에 바보라 놀림을 받으며 고생하다가 평강 공주를 만나서야 비로소 자기 자질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각고의 노력 끝에 고구려 최고의 장수로 거듭났다. 그리고 무사답게 전장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
온달이 죽자 사기가 꺾인 고구려 군사들은 아단성에서 물러나 퇴각했다. 아버지처럼 믿고 따르던 장군을 잃은 군사들은 후퇴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고구려군이 국경 지역에 다다랐을 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온달의 시체를 담은 관(棺)이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힘깨나 쓴다는 군사 수십 명이 달려들었지만, 관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장졸들은 난감했다. 이곳에 계속 머무를 수도 없고, 그렇다고 관을 버리고 갈 수도 없었다. 그들은 할 수 없이 평강공주에게 전령을 보냈다.
비보를 받은 평강이 달려와 보니 군사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관을 움직이려 애쓰고 있었다. 공주는 말에서 내려 관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모습은 초췌하기 이를 데 없었다. 너무 많이 울어서 눈이 짓물러 있었다.
평강은 관을 끌어안고 조용히 속삭였다.
“당신이 국왕 폐하께 했던 맹세를 지키려는 마음은 잘 알겠어요. 하지만 이 모든 게 하늘의 뜻이랍니다. 그러니 부하들 고생 그만 시키고 집으로 갑시다.”
관이 움직이지 않은 이유를 듣고 감동한 군사들은 바닥에 엎드려 도성으로 갈 것을 청했다. 잠시 후 군사들이 관을 들어 올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아무리 애를 써도 움직이지 않던 관이 너무나 가볍게 들렸다.
평강은 남편의 관 뒤를 따라 걸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대성산 아래 움집에서 온달을 처음 본 순간부터 그가 아단성으로 떠나던 날까지의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났다. 공주의 심정과는 달리 무심한 하늘은 높고도 파랬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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