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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은 걱정스럽게 묻는다.
“짐이 어찌하면 되겠느냐?”
“지난날 선대왕께서는 비빈(妃嬪)을 원화로 삼아 낭도들이 받들게 함으로써 권위와 안전을 보장했습니다. 선례를 따라 소첩을 원화로 삼아 주십시오. 변경에 나가 있는 풍월주를 대신해 낭도들의 조알(朝謁)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때마침 설원랑을 비롯한 화랑들의 주청도 있었기에 국왕은 미실의 청을 흔쾌히 들어주었다. 이리하여 원화로 임명된 미실은 설원랑과 미생을 봉사랑(奉事郞)으로 삼고 사다함의 모친인 금진을 화모(花母)로 임명했다.
미실이 원화가 되자 낭도들 사이에서 반감이 크게 일었다. 이 당시 도성에서는 미실에 관한 추문이 끊이지 않았다. 낭도들은 미실이 풍월주를 배신하고 국왕과 통정(通情)하여 권력을 잡았다고 생각했다.
이때 세종은 서변으로 쳐들어온 백제군을 일선에서 격파하고 이 지역의 방비를 강화하기 위해 백성을 독려해 내리서성(內利西城)을 쌓고 있었다.
미실이 원화가 된 후 채 몇 달도 지나지 않아 풍월주 자리가 설원랑에게 넘어갔다. 연통을 받은 세종은 급히 도성으로 돌아왔다. 세종을 따르는 낭도들은 그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워서 달려왔다.
세종은 원래 풍월주 자리에 욕심이 없었기에 이번 일이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아내가 원화로서 자신을 대신하게 됐으니 더 바랄 게 없었다. 그로서는 미실이 원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이때 낭도들의 우두머리 격인 문노(文弩)가 달려와 세종에게 아뢰었다.
“저는 선대 풍월주이신 사다함 공을 받들었고, 그분의 유지에 따라 왕제께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설원랑이 풍월주가 되다니요. 절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낭도들도 문노의 뒤를 이어 아우성쳐댔다.
세종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낭도들을 달랬다.
“그대들의 지지를 고맙게 생각하오. 하지만 당장은 나랏일 때문에 풍월주의 소임을 수행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소. 그럴 바에는 새로운 풍월주를 세우는 게 우리 화랑도를 위해서도 좋소. 설원랑은 덕망 있고 뛰어난 사람이오. 더구나 선대 풍월주의 아우이기도 하오. 그가 맡은 역할을 잘할 수 있도록 여러분이 도와주길 바라오.”
세종이 이렇게까지 부탁하니 낭도들도 더는 불만을 토로할 수 없었다.
진흥왕은 설원랑과 미생에게 낭도를 이끌고 조알토록 했다. 왕은 미실과 함께 낭도들로부터 군례를 받고 그들을 위로하는 의미로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다. 낭도들과 어울리면서도 간간이 미실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불평 한마디 없이 자신의 악행(惡行)을 감싸 안아 준 세종의 넓은 아량이 가슴 아팠기 때문이다. 이때만은 그녀 안에 들끓는 비뚤어진 복수심도 조금은 누그러졌다.
미실이 국왕의 총첩(寵妾)이 된 이후로도 태자 동륜은 자나 깨나 그녀 생각뿐이었다. 침상에 누우면 미실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려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태자는 참다못해 은밀히 미실에게 심복을 보내 만나기를 청했다.
미실은 동륜의 애간장을 녹이려고 몇 번이나 거절했다. 그가 자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자신했기 때문이다. 태자는 예상대로 끈질기게 접근을 시도했다. 이제는 부왕조차도 안중에 없는 듯했다.
얼마 후 미실은 못 이기는 척하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태자를 만났다. 그 뒤로 두 사람의 만남이 잦아지면서 동륜은 그녀에게 병적으로 집착하게 됐다.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골적으로 미실을 찾았다. 태자를 적당히 이용하려 했던 미실로서는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잘못해서 왕의 귀에 들어가면 자기 목숨도 부지하기 어렵게 될 것이었다.
미실은 조용히 동생 미생을 불러 태자의 일을 의논했다. 미생은 수려한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게 간계가 뛰어나고 눈치가 빠른 위인이었다.
미생이 간사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 일은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누님께서는 제가 하라는 대로만 하시면 됩니다.”
미생의 아름다운 얼굴에 냉혹한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며칠 후 미실은 동륜에게 동생을 소개했다. 용모가 화려하고 변설이 뛰어난 미생은 어렵지 않게 동륜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때부터 미생은 동륜을 꾀어내 궐 밖 출입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낭도 중 외모가 출중한 자들을 선별해 태자의 시중을 들게 했다. 동륜은 미생 패거리와 어울려 기방과 노름판 같은 험한 곳을 드나들었다. 술을 진탕 마시고 취하면 거리로 나가 지나가는 부녀자를 희롱하고, 이에 항의하는 자가 있으면 가차 없이 칼을 뽑아 베었다. 새로운 재미에 흠뻑 빠진 태자는 차츰 미실을 잊어 갔다.
태자의 황음무도한 행동에 백성의 원성이 나날이 높아갔고, 결국 왕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진흥왕은 태자를 불러 꾸짖고 행동을 조심하라 단단히 일렀다. 하지만 자제력을 잃은 동륜의 비행은 멈출 줄을 몰랐다.
달이 휘영청 밝은 어느 날 밤이었다. 이날도 동륜은 미생과 어울려 궁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왕이 수문장에게 엄하게 일러 두었기 때문에 태자는 한밤에 궁문으로 몰래 출입할 수 없었다. 그래서 궁궐의 뒷담을 넘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낭도 중 하나가 담 밑에 받치고 서자 동륜은 그의 등을 밟고 담을 넘었다. 이때 갑자기 개 짖는 소리가 사납게 들리더니 곧이어 태자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이를 들은 미생은 서늘한 웃음을 흘리며 낭도들과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순시하던 금군들이 달려갔을 때 태자는 이미 궁에서 키우는 맹견에게 물어 뜯겨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태자가 궁 밖 출입을 하다가 개에게 물려 죽었다는 소문이 퍼지면 왕실의 망신이었다. 진흥왕은 이 사건을 조용히 무마하고 궁인들에게 일절 발설하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렸다. 그래서 태자는 병으로 갑자기 죽은 것으로 처리되었다. 진작 국왕의 눈 밖에 났던 태자였기에 왕후만이 그의 죽음을 애달파했다.
미실은 이럴 때일수록 눈길을 끌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았다. 동륜이 낭도들과 어울려 다녔다는 소문이 도성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일련의 불미스러운 일에 관한 책임을 지고 원화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진흥왕은 이를 윤허하고 태자의 죽음에 책임을 지고 함께 물러날 뜻을 밝힌 설원랑을 대신해 세종을 다시 풍월주로 임명하려 했다. 세종은 풍월주 자리에 욕심은 없었지만 낭도들을 생각하니 단호하게 고사할 수도 없었다.
왕제가 망설이고 있을 때 미실이 찾아와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내 원화의 자리에서 물러나 당신과 더불어 조용히 살고자 했는데 어찌 다시 풍월주의 자리에 올라 풍진(風塵)을 뒤집어쓰려 하십니까? 그냥 설원랑에게 양보하십시오.”
세종은 아내가 진심으로 말하는 줄로 알고 매우 기뻐했다. 그는 국왕에게 설원랑의 유임을 간청했다.
이리하여 설원랑은 풍월주의 자리를 지키게 됐고, 미실은 계속해서 낭도들에게 힘을 미칠 수 있었다.
세종이 풍월주 자리를 포기했는데도 미실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국왕의 곁에 머물렀다. 그런데도 세종은 조금도 불평하지 않고 묵묵히 그녀를 지켜봤다.
태자 동륜이 죽은 후 아우인 사륜(舍輪)은 자신이 뒤를 이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진흥왕에게는 여러 왕자가 있었다. 사륜은 국왕의 총애를 받는 미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로 마음먹고 은밀히 청하여 만났다.
“만일 내가 보위를 이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그대를 왕후로 봉하겠소.”
미실은 사륜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미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진흥왕에게 사륜의 인덕과 총명함에 대해 칭찬했다. 그녀의 사주를 받은 궁인들도 기회만 있으면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면서 국왕의 마음도 차츰 그에게 기울었다. 마침내 진흥왕은 사륜을 태자로 삼겠다고 선포했다.
미실은 복수가 거의 완성되었다고 생각했다. 사다함과 자신을 갈라놓았던 신라 왕실의 권력이 머지않아 자신의 수중에 떨어질 것이었다. 억압하던 자들 위에 군림하는 일이야말로 진정 통쾌한 복수였다.
서력 576년, 진흥왕이 승하하고 사륜이 왕위에 등극했다. 이가 바로 신라 제25대 임금인 진지왕(眞智王)이다. 그는 즉위한 후 미실을 왕후에 봉하려 했으나 대신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선왕의 총첩을 왕후로 맞아들이는 일은 고금의 기록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진지왕으로서는 대신들의 반발을 누를 명분이 없었다. 더구나 즉위 초기에는 신하들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기에 무작정 자기 뜻을 관철할 수는 없었다.
차일피일 미루면서 시간이 흐르자 진지왕은 다른 후궁에 빠졌고, 미실의 존재는 점점 잊혀져 갔다.
화가 난 미실은 암암리에 진지왕을 몰아낼 계책을 세웠다. 그녀는 먼저 진흥왕의 비(妃)인 사도태후(思道太后)를 찾아가 진지왕을 무고했다.
“지난날 태자 동륜의 죽음 뒤에는 사륜왕의 음모가 있었습니다. 그가 몇몇 낭도와 작당하여 태자를 죽이고 사고로 위장한 겁니다.”
동륜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기고 있던 사도 태후는 미실의 말을 듣고 크게 노했다.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피를 나눈 형제를 죽이다니! 이는 짐승만도 못한 짓이다. 내 이를 묵과하지 않겠다!”
태후는 분연히 떨치고 일어났다.
“이대로 국왕을 찾아가 봐야 발뺌할 것이 뻔합니다. 자칫하면 태후 폐하의 안위마저 위태로울 수 있습니다.”
미실이 태후의 옷자락을 잡고 말렸다.
태후는 잠시 분을 가라앉히고는 물었다.
“그렇다면 좋은 계책이라도 있느냐?”
미실이 귀엣말로 속삭이자 태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태후전에서 물러 나온 미실은 설원랑과 미생을 불러들여 낭도를 규합하라 명했다. 그들은 사람들이 눈치채지 않도록 조심하여 궁 밖에 집결했다.
만반의 준비가 끝나자 미실은 초조하게 밤이 오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어둠이 내렸다. 궁성문을 지키던 수문장과 군사들은 태후의 명령에 따라 성문을 열어 놓고 자리를 피했다. 대기하고 있던 낭도들이 발소리를 죽이며 궁으로 들어섰다.
진지왕은 편전에서 업무를 끝내고, 지도부인(知道夫人)이 기다리는 침전으로 들었다. 그녀는 오공(烏公)의 딸로 자색이 뛰어나고 교태가 남달라 국왕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설원랑이 이끄는 낭도들의 발걸음 소리가 편전 주변에서 들렸지만 태후의 지엄한 명령을 받은 궁인들은 누구도 나와 보지 않았다. 갑자기 뛰어든 괴한들을 보고 놀란 시위들은 저항도 못 하고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방 밖에서 나는 소란한 소리에 잠이 깬 진지왕은 큰 소리로 시위를 불렀지만 정작 문을 열고 들어온 건 험악한 인상의 화랑과 낭도들이었다.
진지왕이 이들을 보고 무어라 말을 하려는데 미생이 틈을 주지 않고 달려들더니 가슴에 칼을 겨누었다. 왕은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설원랑은 옆에서 벌벌 떨고 있는 지도부인의 목을 칼끝으로 눌렀다.
“네가 우리 궁주의 속을 뒤집어 놓고도 무사할 줄 알았더냐.”
부인은 애원하는 얼굴로 국왕을 애타게 쳐다보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설원랑은 냉혹한 목소리로 낭도들을 향해 말했다.
“두 사람을 유궁(幽宮)에 가둬라.”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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