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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셴양(李顯陽·67) 전 싱가포르 민간항공국 이사회 의장의 정치적 망명 소식이 세상을 놀라게 했다. 동남아시아의 부국 싱가포르에서 국부로 추앙받는 리콴유(李光耀·1923~2015) 차남이자 20년간 집권 후 5월 물러난 3대 총리 리셴룽(李顯龍·72)의 동생이기 때문이다. 부친 사후 ‘형제의 난’ 여파가 리셴양의 영국 망명으로 이어진 셈이다.
리셴양은 22일(현지시간) 페이스북에 2022년 영국에 망명을 신청한 사실과 그것이 받아들여진 이유를 밝혔다. “박해 당할 위험에 처했다는 근거가 충분하고 싱가포르에 안전하게 돌아갈 수 없다는 (영국 정부의) 결론”이라며 “내 아들을 기소하고 아내를 징계했으며 가짜 경찰 조사가 몇 년을 끌었다”는 주장이다. 1959년 영국령 자치정부이던 시절부터 1990년까지 총리를 지내면서 국민적 존경의 대상이던 리콴유, 무난한 국정 수행을 인정받은 리셰룽의 명성이 모두 타격을 입게 됐다.
별명 ‘파인(Fine) 시티’에서 보듯 싱가포르는 ‘깨끗한·멋진 도시’이자 ‘벌금의 도시’다. 질서정연·청결하고 부유한 싱가포르의 빛과 그늘을 새삼 생각하게 하는 현 사태에 국내외 관심이 높다. 2015년 리콴유가 세상을 떠나면서 사저 처리 문제로 리셴롱과 신경과학자인 여동생 리웨이링(李瑋玲·69세로 최근 별세한 전 싱가포르 국립 뇌신경의학원 원장)·리셴양 사이에 분쟁이 벌어졌다.
정치적 이용을 위해 부친의 유언을 어기려 한다는 게 리셴양·리웨이링의 해석이다. 특히 리셴룽이 부친을 우상화해 ‘리콴유 왕조’를 만들어 아들 리홍이(李鴻毅·37)에게 권좌를 넘기려 한다며 비난해 왔다. 9일 리웨이링의 별세로 리콴유 사저는 또다시 철거냐 보존이냐 논쟁 재점화와 함께 갈림길에 섰다. 5월 취임한 로런스 웡(黃循財) 정부가 어떤 선택을 할지 주목된다.
리셴양은 사저 철거 및 가족이 살 작은 집 신축이 아버지 뜻이라면서 “아버지가 누나(리웨이링)만 떠나면 즉시 밀어내길 원했다. 법 허용 한도 내에서 유언을 이행하는 게 내 의무”라고 강조해 온 반면, 리셴룽은 동생들의 철거·신축 주장 주장에 맞서며 유언장 조작 가능성까지 제기했다. 양측이 서로 각종 의혹을 제기하는 등 진흙탕 폭로전을 벌였다.
리셴양이 영국 일간 가디언 인터뷰에선 “억압적 정부라는 싱가포르의 어두운 면”을 지적하며 “무기 거래, 검은돈, 마약·암호화폐 자금 등 분야에서 핵심 촉진제로서 싱가포르의 역할을 세계가 더 면밀히 들여다봐야 한다”고 제언하기도 했다. 이에 싱가포르 정부가 성명을 내 “근거 없는 주장”이라며 “국제 기준에 부합해 자금세탁과 불법 금융 흐름을 억제·저지할 탄탄한 체계를 갖췄다”고 반박했다. 또 “누구도 법 위에 있지 않다”며 “초대 총리의 자손을 포함해 누구든 수사 대상이 되거나 법정에 설 수 있다”고 강조했다.
싱가포르 옥슬리가(街) 38번지는 1890년대 말 지어져 리콴유 일가가 1950년대부터 살기 시작했다. 자녀들이 성장한 집이자 1965년 독립 이래 집권 중인 인민행동당(PAP) 창당 논의가 진행된 곳이다. 앞서 2018년 현지 정부 장관급 위원회는 ‘국가기념물 지정, 일부 공간만 보존, 철거 후 재개발’ 등 방안을 담은 보고서를 낸 바 있다.
이들 형제 간 갈등 문제는 2017년 7월 의회 석상에까지 올랐다. 리셴룽 당시 총리가 의회에 출석해 깊은 유감과 사과의 뜻을 밝히면서도 동생들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아울러 “전혀 근거 없는 주장으로 싱가포르의 명성에 흠집을 냈으며 대(對)정부 신뢰에 악영향을 미친다. 부모가 살아 계셨다면 수치스러웠으리라 생각하니 고통스럽다”는 심경을 토로했다.
이어 리셴롱은 “2011년 생전 아버님이 사저를 허물지 말고 수리하자는 제안을 받아들인 바 있다”며 “아버님 저서 출간 이후 (철거하지 말라는) 강력한 여론도 있었다”고 말했다. 또 그해 신문 편집인들에게 의견을 물었을 때 보존 의견이 우세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다만 동생들을 향한 법적 대응은 삼가하기로 했다.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소송을 제기했겠지만 부모님 이름만 더 욕되게 한다”는 것이다.
싱가포르란 싱가푸라(말레이어)를 영어식으로 발음한 것으로 ‘사자 도시’(산스크리트어)를 의미한다. 가장 초기 이름으로 말레이어 ‘풀라우 우종’(반도 끝에 있는 섬), 자바어 ‘테마섹’(바다 마을)이 있다. 1330년 원나라 항해가인 왕대인이 방문한 후 소개한 ‘담마석’(淡馬錫)은 테마섹의 한자 음역으로 추정된다. 수마트라(인도네시아) 벵쿨렌(현 벵쿨루)의 영국인들이 인근 섬들 조사를 마치고 1819년 1월 싱가포르에 상륙했을 땐 습지로 덮인 어촌에 불과했다.
이후 여러 바닷길의 합류 지점인 말레이반도 끝자락 싱가포르는 중국 정크선, 인도 선박, 아랍의 다우선, 포르투갈 전함 등 다양한 선박이 모이는 교역소로 번성했다. 유럽인 상인, 유라시안, 부유한 아시아인이 살았으며 화교는 현재 차이나타운과 싱가포르 리버의 동남쪽 지역에 자리잡았다. 차이나타운의 출리아 캄퐁 북쪽 지역과 캄퐁 글램 지역엔 인도인들이 많이 살고 무슬림 말레이족 및 아랍 이주민들도 살게 됐다.
번영과 평화를 누리던 싱가포르는 1941년 12월 일본군의 공격 앞에 무너졌다. 영국군 역사상 최대 참패였다. 한 때 ‘난공불락의 요새’로 불리던 이곳이 일본어 쇼난토(昭南島)로 바뀐다. 일본 패망 후엔 영국군정에 넘겨졌고 페낭·말라카·싱가포르로 구성된 해협 식민지가 갈라질 때까지 이 상태를 이어갔으며 1946년 4월 영국 왕의 직할 식민지가 됐다.
1959년 자치정부 수립으로 싱가포르 최초 총선을 통해 43석을 차지한 인민행동당 대표 리콴유가 제1대 총리에 올랐다. 1963년 말레이·싱가포르·사라와크 및 보르네오 북부(현재 사바) 연합으로 말레이시아가 수립됐으나 2년도 못 돼 1965년 8월9일 싱가포르는 분리된다. 화교 영향력을 경계한 말레지아 연합 세력의 견제로 축출된 것이나 다름없다. 이후 60년 미만의 시간 속에 놀라운 성공을 이룬 싱가포르지만 새삼 국가통합과 ‘좋은 나라란 무엇인가’에 관한 고민을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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