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나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138] 다시 5호선 지하철을 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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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들이 받은 메일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7-24 06:30:10

아내와 아이들이 떠나고도 내가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마당에 깊이 뿌리 내린 모과나무 때문일지도 몰랐다. 아내의 방이 허물어지고 아이들의 방이 무너지고 마당을 지키던 모과나무마저 흔적 없이 사라지는 순간을 상상하자 내 인생의 허리가 부러지고 사지가 뜯겨 나가는 기분이었다. 내가 살았던 생의 흔적이 내 목숨보다 먼저 흩어지려 하고 있었다.

다음 역을 알리는 자동 안내방송과 부동산 사장의 목소리가 뒤섞였다. 알겠다고, 내일 아이들 엄마가 전화할 거라고 말한 뒤 나는 부동산 사장과 통화를 마쳤다. 눈을 감고 유리문에 쿵쿵, 이마를 찧었다. 유리문 저쪽의 사내도 내게 머리를 기대 왔다. 그러나 섣부른 위로의 말은 건네지 않았다.

역에 도착한 열차가 출입문을 열었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5호선으로 갈아타야 할 환승역이었다. 나는 어깨를 부딪쳐 오는 사람들을 밀치고 서둘러 승강장으로 내려섰다. 열차는 나를 내려놓고 부랴부랴 문을 닫고 꼬리를 흔들며 떠났다. 지하철 유리문 너머에 있던 사내도 열차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아니, 어쩌면 객차 안에 있던 내가 사라진 것일지도 몰랐다. 유리문 밖 어둠 속에 있던 그 사내가 진짜 나인지도 알 수 없었다.

여의나루역으로 가기 위해 갈아탄 5호선 열차 안에서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좌석의 맨 끝에 서 있었다. 내 옆에 앉거나 서 있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손에 든 휴대전화를 들여다보았다. 가까이 서 있던 소년들도 다르지 않았다. 염색의 농도가 조금씩 다른 청바지나 모직 바지를 입고 그 위에 점퍼나 코트를 제각각 입은 고등학생들은 화면을 보며 킬킬거리고 시답잖은 농담들을 주고받았다.

“서류 통과하고 인성 검사에서 떨어진 것만 다섯 번째야.”

“너네 형 스카이 아니냐?”

“인성이 바닥. 태블릿 좀 만졌다고 맞아 죽을 뻔.”

“잘못했네. 나라도 팬다.”

“죽을래?”

“근데 화가 나서 다른 사람을 때리고 싶은 적 있었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답할 거냐?”

“바보냐?”

갈색 랜드로버를 신은 아이의 형에 대한 이야기였다. 노란색 끈을 느슨하게 묶은 운동화가 남의 물건을 함부로 만지는 아이였고 이것저것 궁금한 아이는 초록색 운동화였다. 나는 귀를 세워 오래전 내게서 사라진 호기심과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어설픈 목소리, 철없는 웃음에 귀 기울였다. 내 아이들도 곧 저만큼 키가 크겠지. 밝고 쾌활하겠지. 그때의 아이들은 나를 기억할까? 나는 그때도 아이들의 아빠일까?

“이건 뭐지?”

친구들 이야기에는 흥미 없다는 듯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던 파란색 운동화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참견하기 좋아하는 노란 줄이 “뭐?” 하고 다가섰다. 다른 아이들도 파란 운동화가 들고 있는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트러스트 미?”

노란 줄이 물었다. 나는 놀라 고개를 돌렸다.

“어, 그거. 나도 받았어.”

발목까지 올라오는 갈색 랜드로버가 아는 체를 했다.

“뭔데?”

“몰라. 열어 보지 않았어.”

“트러스트 미? 사기꾼 대사 아니냐?”

“속고만 살았냐?”

“그러다 낚인다.”

소년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