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나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133] 빨간 양말을 신은 아이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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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게도 꿈이 있었다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7-17 06:30:01

하운에게 지금의 이 혼란스럽고 두려운 감정을 털어놓는다면 나는 48시간은커녕 오늘 하루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버릴 것이다. 어쩌면 하운이 전화 대신 문자를 보내는 건 지금 내가 느끼고 있을 위기와 불안을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은 뒤 손을 씻다가 거울을 보았다. 아버지가 날 기억하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가 이곳에 없는 것처럼, 지금의 나는 아버지의 기억에 없었다. 아버지가 기억하는 나도 여기에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아버지의 아들일까?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아버지는 나의 아버지일까? 거울 속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래도 나는 턱을 쳐들어 목에 남은 사흘 전 흔적을, 검붉은 멍으로 변해 버린 죽음의 흉측한 자국을 더듬었다. 나를 낳은 부모 앞에서만큼은 절대 보이지 말아야 할 죽음의 그림자였다. 나는 아버지 몰래 저지른 나의 죄를 잘 감추기 위해 니트의 목 부분을 한껏 높이 끌어올렸다.

아버지의 침상은 온통 그림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나는 입을 하, 벌렸다. 그림 속 아이들은 모두 빨간 양말을 신고 있었다. 아버지가 그리다 만 아이가 누구인지 알았다. 나도 아니고 달봉이도 아니었다.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이루지 못한 꿈이었다. 레드삭스. 하늘을 날듯 멀리, 2004년 월드시리즈 4차전에서 팀의 승리를 확정 짓는 선제 솔로 홈런을 친 타자, 조니 데이먼이 생각났다.

아버지가 내게 연락한 건 꼭 두 번이었다. 2004년과 2013년, 레드삭스가 우승하던 두 번의 가을이었다. 베이브 루스를 헐값에 트레이드한 뒤 저주에 걸렸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부진을 면치 못했던 보스턴 레드삭스가 86년 만에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던 날, “봤니?” 전화기 저편에서 상기된 목소리로 아버지가 물었다. 그렇게 흥분한 아버지의 음성은 처음이었다.

레드삭스 팬이던 아버지가 맞이한 생애 첫 우승이기도 했다. 왜 하필 우승 언저리에도 가지 못하는 레드삭스를 응원하는지 나는 알지 못했으므로 심드렁하게 “네” 하고 대답했다. “그래. 봤구나. 잘했다.” 그렇게 말한 뒤 아버지는 말이 없었다. 나도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조니 데이먼이 멋지더구나.” 아버지가 말했다. 나는 또 “네” 하고 답했다. “잘 지내거라.” 긴 침묵 끝에 아버지가 말했다. 아버지와 아들의 통화는 그게 다였다. 또 한 번의 우승을 했던 2013년도에도 다르지 않았다.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고 나는 곧잘 다락방에 숨어들었다. 그곳에서 먼지 쌓인 트로피 몇 개와 헐렁하고 어설픈 야구단 유니폼을 입은 소년의 빛바랜 사진을 찾았다. 폼나게 야구방망이를 들고 서 있는 소년과 트로피에 새겨진 이름은 틀림없는 아버지였다. 학창 시절 야구에 재능을 보였던 아버지가 왜 신앙의 길에 들어선 것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그 시절엔 프로야구가 없었을 테니 직업 운동선수가 되지 못한 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몰랐다.

“소명이었지.”

꼭 한 번, 목사가 된 이유를 내가 물었을 때 아버지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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