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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나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55] 세상을 다르게 보는 법
몰래 지켜보는 건 정직한 일이 아니지만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3-22 06:30:10
 
 
하늘을 찌를 듯 솟은 대나무들은 햇빛을 받는 정도와 각도에 따라 초록의 채도와 명도가 달라 보였습니다. 날아갔던 황조롱이가 다시 찾아든 둥지, 호기심에 차 바라보는 다람쥐의 검은 눈동자와 탐스러운 꼬리털, 먹이를 물고 행렬하는 개미 떼까지 예사롭지 않아 보였습니다.
 
산 아래, 구불구불 흘러가는 물줄기처럼 길과 길이 서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물 위를 떠 가는 나뭇잎처럼 오갔습니다. 장을 보고 돌아오는 순길네가 보였습니다. 머리 위에 간당간당 보따리를 이고 걸어가다 말고 가슴팍에 손을 넣어 몸을 긁적거렸습니다. 또 다른 길에서는 아래채의 돌이가 사방을 두리번거리더니 코를 훔치고는 나무줄기에 쓰윽, 옷소매를 문질렀습니다.
 
뒤늦게 나를 찾아 나선 범이 할아범이 숨 가쁘게 올라오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세상에 무서울 게 없을 것 같던 할아범은 행여나 나를 찾지 못할까 봐 초조하고 불안하여 여기저기 두리번거렸습니다. 오십 보쯤 떨어진 곳에서는 황 서방이 나뭇짐을 가득 올린 지게를 지고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힘이 드는지 한숨을 끄응, 내쉬고는 잠시 멈춰 섰는데 방귀를 부르릉 뀌어댔습니다. 나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습니다.
 
숨는 것은 겁이 나서가 아니라 더 잘 보기 위한 전략이라는 나의 생각은 옳았습니다. 보는 눈이 없다고 생각하면 사람들은 긴장을 놓습니다. 맹수도 더 잘 보기 위해 몸을 숨기고 먹이를 노렸습니다. 숨죽여 눈을 크게 뜨고 가장 적절한 먹잇감을 탐색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세상을 다르게 보는 법을 혼자 터득하는 중이었습니다. 거울을 보며 분단장하기 바쁜 언니들은 내가 하는 놀이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다 보이잖아요.”
 
그래, 정말 잘 보이는구나.”
 
허리를 펴고 일어서며 할아버지가 말씀하셨습니다.
 
그래도 누군가를 몰래 지켜보는 건 정직한 일이 아닌 것 같구나.”
 
저도 알아요, 할아버지. 제가 본 건 아무한테도 이야기하지 않는걸요. 다만 숨어서 관찰하면 더 많은 것을 훨씬 정확하게 알 수 있어요.”
 
할아버지의 눈을 올려다보며 또렷하게 내가 말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도 멀리 가신 거잖아요.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
 
나는 할아버지가 내 머리를 말없이 쓰다듬으실 수 있도록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나라를 찾았는데도 아버지는 왜 돌아오지 않는지 말해 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나는 죽음이라는 말을 어렴풋이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곧 어린 죽순이 올라올 게다. 위험하니 당분간은 올라오지 말도록 하거라.”
 
할아버지가 다소 엄하게 말했습니다. 나는 순하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아이구, 애기씨. 또 혼자 산에 올라오시면 다음부터는 안 업어 드릴 겁니다.”
 
숨이 턱까지 찬 범이 할아범이 반갑게 달려왔습니다. 말은 그렇게 해도 햇볕에 그을려 검고 쭈글쭈글한 할아범의 얼굴에 환한 웃음꽃이 피었습니다. 할아범이 쭈그리고 앉아 등을 내주었습니다. 숲을 내려가며 할아버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한나절 숲을 헤매고 노느라 고단했던 나는 범이 할아범의 굽은 등에 업힌 채 집에 들어서기도 전에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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