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희문의 영화세상] “요즘 조폭영화들은 마 겡상도 아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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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문 필진페이지 + 입력 2024-10-31 06:30:05

영화 ‘친구’(2001)는 2001년 3월에 개봉돼 8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천만’ 관객이 처음 나오는 2004년 이전까지는 역대 최고의 흥행기록을 세운 영화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몇 가지 기록을 남겼는데 무엇보다 한국 영화 흥행 돌풍을 일으키며 ‘천만’ 영화에 대한 기대를 한껏 높인 것을 들 수 있다. 당시로서는 ‘천만’ 관객 돌파가 설마 이루어질까 반신반의하는 분위기였지만 ‘친구’는 그게 실현 불가능한 숫자는 아니라는 확신을 주었다. 실제로 2년 후인 2003년 연말에 개봉된 ‘실미도’는 다음 해까지 흥행을 이어 간 끝에 처음으로 ‘천만’ 관객 기록을 돌파했다.

‘친구’는 영화에 묘사된 폭력을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수준으로 높였다. 집단 패싸움과 교사의 폭력·여성의 성기를 지칭하는 비속어의 정면 사용·조폭 행동대원들 간의 무자비한 폭력 묘사 등 지금 보아도 수위가 높아 보이는 장면들이 거침없이 튀어나와 충격을 주었다. 이후에 나온 조폭 영화들은 극도로 잔인한 장면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런 사실들과 함께 ‘친구’는 조폭 영화의 배경이 경상도(주로 부산)로 바뀌는 중요한 전환점으로도 한몫을 했다. 이전에도 경상도 지역어를 사용하는 캐릭터가 등장하는 영화들은 더러 있었지만 대부분 무뚝뚝하고 투박스러워도 속 깊은 인간미를 풍기는 역할이었다.

하지만 ‘친구’는 이런 통념을 깨고 부산을 근거로 하는 조직폭력배의 인상을 강하게 부각시켰고, 이제는 경상도 지역어를 사용하는 조폭 영화가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사생결단’(2006)이나 ‘범죄와의 전쟁’(2012), ‘보안관’(2017), ‘마약왕’(2018), ‘대외비’(2023) 같은 영화들은 진한 경상도 말을 사용한 작품들이고 중심 캐릭터들은 밀수·마약·폭력 등의 범죄와 연결되어 있다. ‘변호인’(2013)은 불의에 맞서는 것 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당하지 못한 국가 권력이 개인을 죽음으로 몰아간다고 비판하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조폭 영화에선 지역어라면 오랫동안 전라도 말이 당연한 듯 쓰였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전라도 말은 찰진 정감이 넘치는 생활 언어로 바뀌었다. 2012년부터 방영된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나 영화 ‘곡성‘(2016) 같은 작품들에 등장하는 전라도 말은 친근하기까지 하다. 배경이 전라도인데도 전라도 지역어를 사용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여러 편의 ‘춘향전’ 영화나 ‘화려한 휴가’ ‘태백산맥’ 같은 영화들에서 주연급 등장인물은 전혀 지역어를 사용하지 않고 유려한 서울 표준말을 사용한다.

6·25전쟁 당시 형제가 좌익과 우익으로 대립하지만 인민군 형은 반듯한 말투와 행동을 보이는데 비해 진한 전라도 말을 쓰는 동생은 과부나 후리고 다니는 저잣거리 건달패로 묘사된다. 5·18 사태 때 계엄군에게 무장하고 대응하는 시민군 지도자·성당의 신부·택시 운전사·마이크 잡고 시민을 선동하는 간호사 등 주연급 인물들은 모두 반듯한 표준어를 사용한다. 당시만 해도 지역색이 뚜렷하게 남아있던 시절이다.

춘향은 남원에서 나고 자랐다. 남원 밖으로는 한 번도 나간 적이 없다. 그런데도 ‘춘향’을 소재로 한 어느 영화에서도 주인공은 반듯한 표준어를 사용할 뿐 지역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진한 전라도 지역어를 사용하면 캐릭터가 가벼워 보이거나 진지한 대목에서 오히려 웃음이 나지나 않을까 염려하기 때문일 것이다. 방자나 향단이 같은 감초 역할들은 웃음을 유발하기 위해 오히려 지역어를 더욱 과장해서 쓴다.

지역어를 영화의 소재로 사용한 경우도 있다. ‘황산벌’(2003)은 신라의 김춘추나 김유신·백제의 의자왕이나 계백·고구려의 연개소문 같은 캐릭터를 등장시켜 각각의 지역어를 사용했을 때 생기는 소동을 묘사하고 있다. 전라도 지역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거시기’의 다양하면서도 미묘한 차이를 몰라 경상도 지역 군사들이 이를 해석하는 데 골머리를 앓는 장면에서는 웃음이 나올 정도다.

‘위험한 상견례’(2011)에선 전라도 총각과 경상도 처녀의 웃음 쏟아지는 연애 이야기가 펼쳐진다.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젊은 커플은 사랑을 이루는 데 성공하고 앙숙이던 두 집안 아버지들의 화해·오랫동안 천덕꾸러기로 눈총 받던 노처녀 시누이의 러브 스토리·전라도 출신임을 숨긴 채 서울 사람인 양 내숭을 떨어 오던 엄마의 본색 드러내기는 영화의 반전 장면들이다.

전라도에서는 전라도 말을 쓰고 경상도에서는 경상도 말을 하는 것이 당연하기는 하지만 요즘 한국 영화에서 경상도 말을 사용하는 캐릭터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자기 고집대로 밀어붙이는 고집불통이거나 각종 범죄에 연루된 조폭·마약상·그늘에서 흉계를 꾸미는 모사꾼 같은 캐릭터들이다. 덩달아 경상도의 이미지까지 바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