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나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182] 터널보다 깊은 어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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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억 년의 상처를 품은 달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10-01 06:30:33

터널을 달릴 때 승객들은 어둠 밖에 있었다. 지하철 실내의 밝은 조명, 손에 들고 있는 스마트폰, 기기에 연결되어 귀에 꽂힌 이어폰과 화면 위에 못 박힌 시선들. 같은 길을 달리면서도 매 순간 어둠을 정면으로 주시해야 하는 기관사와 달리 승객들은 등 뒤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어둠을 인식조차 하지 못했다. 검은 유리창에 비치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건 나뿐이었다.

승객들은 나와 함께 어둠 속을 달리고 있었으나 나와는 다른 세계, 어둠의 바깥에 존재했다. 함께 있으나 만나지 않는 시선, 어긋나 버린 응시. 출입문에 기대선 채 나는 무언가를 하기 전, 어딘가에 도착하기 전, 누군가를 만나 웃으며 인사하기 전 잠시 벗어 놓은 가면 아래 그들의 무표정한 얼굴과 무기력한 시선을 구경꾼처럼 지켜보았다.

달봉의 턱을 가격했던 주먹도, 달봉에게 얻어맞은 턱도 욱신거렸다. 최 박사의 약이 효력을 다해 가는 것인지 눈앞이 간헐적으로 흐릿해지곤 했다. 지하철을 달릴 때 평균 2분 간격으로 반복되던 터널과 승강장의 어둠과 빛. 수많은 날을, 하루에도 헤아릴 수 없이 여러 번, 홍채는 동공의 크기를 확대하거나 축소하면서 빛의 양을 조절해 왔을 것이다. 그런데도 내 눈은 어둠과 빛, 그 어느 쪽에도 능숙하게 적응하지 못했다.

나는 눈을 감고 손가락으로 눈두덩을 꾸욱 누르고 빙글빙글 문질렀다. 눈을 감으면 훤히 보이는 어둠은 운전석에서 마주하던 터널의 어둠보다 더 깊고 캄캄했다. 눈알에 굴러다니던 수많은 모래 알갱이들이 암흑의 진공청소기 속으로 우르르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희미한 빛이 보였다. 빛은 점점 선명해지더니 어둠 한가운데에 쩍쩍 금을 그었다. 사선으로, 직선으로, 빗금으로, 흩어지고 갈라지고 부러진 빛의 실금들이 스스로 발광하며 심해를 헤엄치는 괴생물체처럼 살아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닿을 수 없는 먼 곳, 둥글고 창백한 빛의 터널은 자꾸만 멀어졌다.

겨울 해는 짧았다. 지하철에서 내려 약속 장소를 향해 걷는 길, 어제보다는 한결 배가 부풀었을 달이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절반뿐인 달의 허리에도 분화구 그림자가 선명했다. 그때 그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로, 운석에 얻어맞아 생긴 상처 자국을 수십만 개 몸에 새긴 달이었다. 귀찮고 성가시고 고통스럽고 외로웠던 상흔은 45억 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았다.

놀이터의 가로등은 환하게 불을 밝히고 아내와 아이들을 비추고 있었다. 빨간색 방울 모자를 쓴 작은아이가 뭐라고 말을 하자 벤치에 앉아 있던 아내가 웃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미소였다. 날 보며 아내가 웃어 주던 시절, 나는 세상이 내게 준 아픔을 다 잊을 수 있었다.

작은아이는 작은 발로 모래를 쿡쿡 밟았다. 아이가 종알거리자 아내는 머리를 끄덕이고 또 뭐라고 이야기하며 웃었다. 그네에 앉아 발을 흔들고 있는 큰아이를 눈여겨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혹시라도 다칠까 봐, 행여 시야에서 놓칠까 봐, 세상에 내놓은 아이에 대한 조심스러운 염려가 담긴 엄마의 눈길이었다.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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