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로 시작한 역할극이 ‘다큐’가 될 때… 연극 '트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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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록 있는 여섯 배우의 불꽃 튀는 연기 대결
27일~10월20일까지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서

임유이 기자 기자페이지 + 입력 2024-09-29 17:59:19

▲ 우연히 펼쳐진 모의재판에서 인간의 숨은 죄를 추적하는 블랙코미디 '트랩. 세종문화회관

“전 그저 상식적으로 살고 있습니다. 지극히 상식적으로요.”

피고 트랍스는 독사같이 교활하다는 검사 앞에서도 여유롭다. 심심한 노인들의 놀이라고 생각하고 모의 법정에 섰기 때문이다.

27일부터 다음 달 20일까지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상연하는 연극 ‘트랩’은 우연히 펼쳐진 모의재판에서 인간의 숨은 죄를 추적하는 블랙코미디다. 스위스의 극작가 프리드리히 뒤렌마트의 단편소설 ‘사고’를 원작으로 한다.

변호사가 피고에게 다그친다. 죄가 있다면 자기한테만큼은 솔직해야 한다고. 하지만 트랍스는 ‘완벽하게 없다’고 말한다. 그는 검사나 변호사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묻는 말에 거침없이 대답하며 질문이 흥미롭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연출가 하수민은 “이 작품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도덕과 양심에 관해 이야기한다. 요즘 사회에서 우리들은 도대체 무엇에 가치를 두고 살아가고 있느냐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고 말한다.

극 중 검사의 이름 초른은 독일어로 분노를 뜻하고 변호사의 이름 쿰머는 걱정을 뜻한다. 마지막에 판결하는 판사이자 유일하게 이름이 없는 집주인은 무엇일까? 하 연출은 판사를 신의 위치에 두었다고 밝혔다.

섬유회사 판매 총책임자 트랍스는 출장길 뜻하지 않은 자동차 사고로 발이 묶인다. 그는 조용한 시골 마을의 퇴직한 판사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고 집주인은 그를 특이한 저녁 식사 자리에 초대한다.

과거에 판사·검사·변호사·사형집행관으로 일했다는 네 명의 노인은 시간이 날 때마다 모여서 모의재판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그들은 트랍스에게 피고 역을 맡아 줄 수 있느냐고 묻는다.

트랍스는 호기심으로 초대에 응하는데 “마치 동화 속에 들어온 기분”이라며 가볍게 시작한 트랍스는 어느 순간부터 웃음기를 잃는다. 숨길 것도 죄지은 것도 없다는 자신만만한 태도는 사라지고 재판을 통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마음속 깊이 짊어지고 있던 마음의 짐을 노인들 앞에서 하나둘씩 꺼내 놓는 과정에서 트랩스는 처음으로 해방감을 느낀다. 그러나 “이제부터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다짐과 달리 극 후반부에 이르러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을 한다.

다이닝룸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90분 동안 펼쳐지는 연극이지만 관록 있는 여섯 배우의 빈틈없는 연기 덕분에 객석의 몰입도가 상당하다.

주인공 트랍스를 연기한 김명기는 재판이 진행되면서 서서히 변해 가는 감정선을 섬세하게 표현한다. 집주인 역의 남명렬은 여든을 앞둔 노인으로 변신해 위엄 있는 연기를 펼친다.

검사 역의 강신구과 변호사 역의 김신기도 팽팽하게 부딪히며 관객의 몰입을 유도한다. 가사도우미 시모네 역의 이승우는 피아노 연주까지 소화하며 보는 재미를 더한다.

남명렬은 “우리는 우리 나름의 작품을 만들어낸다. 100명의 관객이 있다면 100가지 방법으로 연극을 즐겼으면 좋겠다. 저 역시 무의식적으로 행했던 지난 행동들을 들여다보면서 나 자신의 무가치함을 느끼는 특별한 시간이었다. 여러분도 연극을 통해 인간의 삶이 무엇인지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임유이 기자 lye@skyedaily.com 기자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