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문형의 만사만감(萬事萬感)] 버리기 전에 일단 용도를 변경해 보자

이 시간 주요기사

뉴스 > 전문가칼럼

최문형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9-27 06:31:00

한때 살림에 푹 빠진 적이 있었다. 집 넓이가 작아진 게 계기였다. 넓은 집에서야 온통 늘어놓고 살았지만 평수를 줄이게 되니 살림을 다 가지고 사는 것 자체가 미션이었다. 당시만 해도 먼지 한 톨 안 버릴 때라서 어떻게든 꾸역꾸역 쌓아 두는 게 능사였다. 좁아진 아이들 방에 책상·침대 등이 모두 들어가야 하는데 침대가 책상에 딱 붙어 있으면 수시로 누울 것 같아서 큼직한 책장을 그 사이에 눕혀서 가벽을 세웠다. 주방 옆 다용도실에는 낡은 식탁을 넣고 작업실로 썼다.

그 외에도 좁은 집 인테리어를 위해 별별 궁리를 다했다. 지금 같으면 몇 개 버리고 시원하게 살았을 텐데 그때는 무슨 욕심이 그리 많았는지! 주방 그릇도 모두 수납하느라 애를 먹었다. 의외로 사무용품이 도움이 되었다. 접시나 프라이팬을 홀더에 끼우니 아주 좋았다. 지금이야 정리 전문가들이 있어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그때만 해도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이었다. 집 도면을 그리고 줄자를 친구 삼아 가구를 배치하면서 조금만 더 노력하면 인테리어 전문가가 되는가 싶어 흐뭇했다.

아주 작은 변화가 큰 효용을 가져온다는 게 그때 얻은 교훈이었다. 수직으로 있던 것을 수평으로 두고 책상에서 쓰던 것을 주방으로 가져오면 책장이 가벽이 되고, 사무용품이 주방용품이 되고 주방 다용도실이 작업실이 된다. 이러한 용도 변경은 아주 매력이 있다. 책상에서 보던 물건을 주방 수납장 안에서 만나면 반갑다. 책장 가벽 너머 침대에 누우면 아늑해서 잠이 잘 온다. 주방 옆 작업실의 장점은 냄비에 음식을 조리하면서 일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어느 날 집이 넓어졌다. 내가 바빠진 틈을 타서 버리기 좋아하는 아들 녀석이 하나씩 둘씩 ‘당근질’을 하기 시작했다. 어느 새 아이가 커서 살림에 관여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들은 버리는 걸 정말 좋아한다. 당장 안 쓴다고 판단이 되면 가차 없이 집 밖으로 내동댕이친다. 덕분에 집이 깨끗해졌다. 그런데 버리기 전에 한 번 용도 변경을 하면 평소 필요했던 곳에서 아주 유용하게 사용한다. 유튜브 정리 전문가들의 지혜도 용도 변경이 포인트이다. 그분들은 심지어 휴지심이나 물티슈 뚜껑도 유용하게 활용하는 꿀팁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정말 탄성이 나온다.

사람도 용도 변경해 보자. 생각만 바꾸면 된다. 공감 못 해 주고 사랑해 주지 않는 부모님이란 생각이 드는가. 그럼 그분을 기숙사 사감님이라고 생각하자. 그 사감님은 공짜로 나에게 의식주를 제공해 주지 않는가. 그리고 사감님 덕분에 안전하게 산다. 매일 술 마시고 들어오는 재미없는 남편은 아이들 아빠로 용도 변경하고, 그것도 별로이면 현금 출금기라고 생각하자. 그래도 돈은 벌어 오니까 종종 기름칠하고 닦아 주기만 하면 된다.

잔소리쟁이 마누라는? 연애할 때만큼 사랑스럽진 않지만 그 잔소리로 아이들을 잘 키우지 않는가. 말 안 듣고 속만 썩이는 아이들은? 드라마 대용으로 쓰면 된다. 시청률 높은 풍비박산 드라마 보듯 하면 된다. 강도가 세면 액션 영화로 취급하면 된다. 단, 나만 빼내어 시청자 자리에 두는 지혜가 요구된다.

그런데 그게 잘 안 되면 어떡해야 하나? 에라! 나를 바꾸면 된다. 나의 용도를 변경하면 아주 간단하다. 정말 내 마음 몰라 주는 가족과는 단순한 동거인으로 살면 된다. 맨날 스트레스 주는 회사 상사한테는 웃으며 꼬리만 흔든다. 그는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못한다.

이혼이나 결별을 단행하기 전에 상대 또는 나를 용도 변경해 보는 것도 삶의 지혜다. 버리기 직전까지는 그래도 뭐라도 해 보자. 그러다 보면 창의성 가득한 인생이 된다. 찬란한 문화의 시대에 창의성 만한 게 없다. 포스트잇은 불량테이프에서 유래했지만 테이프보다 유용하여 히트 쳤다. 우리가 즐겨 먹는 컵라면은 컵 안에 라면을 담지 않고 라면에 컵을 씌우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공장에서 이 방식을 고안하느라 엄청 애를 먹었다고 한다.

인간관계도 창의적으로 바꾸어 볼 필요가 있다. 나르시시스트 부모님은 유능하고 성실한 기숙사 사감으로 변하고, 꼴 보기 싫은 남편은 윤이 나는 현금출금기로 바뀐다. 호랑이 같은 마누라는 하숙집 주인으로 치부하자. 매일의 날도 용도 변경이 된다. 생일날만 빼고 지루한 나의 일상을 매일 ‘생일 아닌 날’로 축하해 주자.

나 자신도 용도 변경해 보자. 무엇이든 가능하다. 회사 생활이 지겹거나 주부 생활이 지루하면 초보자가 되어 보자. 평소에 배우고 싶은 걸 하면 된다. 스마트폰 안에 재능 기부해 주는 선생님을 찾으면 된다. 각 분야 전문가인 유튜버 분들이다. 이분들의 도움으로 초보 가수·초보 댄서·초보 유튜버·초보 봉재사 등 무엇이든 가능하다. 버리는 게 능사가 아니다. 버리기 전에 꼭 용도 변경을 고민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