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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먼드 그린 신임 미국재대만협회(AIT·American Institute in Taiwan) 타이베이 사무처장이 4일 타이베이에서 부임 후 첫 기자회견을 가졌다. 미국-중국·양안(중국-대만) 관계를 둘러싼 민감한 지정학 관련해 의미심장한 발언들이 많았다. 구구절절 완곡하면서도 단호한 미국의 의지가 드러난다.
AIT는 1979년 미국이 중화인민공화국(중국)과 수교하며 중화민국(대만)과의 공식 외교관계를 단절할 때 설립됐다. 지난 45년간 사실상 주(駐)대만 미 대사관 역할을 해 왔기에 이 조직의 수장이란 대사나 다름없다. 국무부 고위 외교관 출신인 그린 처장은 7월 초 부임해 라이 총통 예방 등 공식 업무를 이미 개시한 상태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그린 처장이 이날 “대만 방어가 미국 무기 공급의 최우선 순위”라며 “무기 공동생산” 문제를 언급했다. “미국은 여러 파트너 국가와 협력하고 있다. 현재 이들과 군수품 공동생산 확대를 검토 중”이라며 “향후 대만이 이런 파트너가 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다. 더 이상 구체적인 언급을 하진 않았으나 묵직한 의미로 해석된다.
특히 “중국의 현상(status quo) 변경 시도에 대만이 유일한 목표는 아니다”라고 말한 부분도 중요하다. “이 지역에서 중국과의 전략적 균형 유지가 양안관계 발전을 촉진할 것”이라면서도 명확한 경계심을 천명한 셈이다. ‘대만 접수’에 성공할 경우 중국의 행보가 거기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인식의 표현이다. 즉 중국의 태평양 진출은 시간문제이며 이것이 미국 주도 세계 질서를 흔들 도전임을 암시한다.
대만 매체들은 미국이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한·미·일 관계, 미·일 관계, 미·일 필리핀 관계, 쿼드(Quad·미국·일본·호주·인도 안보협의체), 미·영·호주 동맹 등 종횡으로 엮인 동맹 네트워크 구축을 노력하고 있으며 이것이 인도·태평양 지역의 갈등 예방과 평화 안정에 도움을 줄 것이라는 그린 처장의 말을 전했다. “미국의 초점이 충돌 발생을 피하고 ‘현상 유지’ 및 ‘평화 유지’에 맞춰져 있다”는 대목도 주목된다.
인구·면적이 각각 대한민국 절반에 못 미치지만 대만은 역사·문화·혈통적으로 복잡다단한 배경을 가진 곳이다. 더 이상 중화민국 망명정부가 아니라 대만 토착민 내지 현지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의 정체성과 이익을 중시하게 된 게 지난 30여 년 민주화 이래의 핵심적 방향성이었다.
양안관계는 미·중 밀월시대 호혜적 황금기를 보냈으나 시진핑정부 들어 완전히 달라졌다. 무엇보다 ‘중국의 홍콩화’를 기대하던 대만인들이 ‘홍콩의 중국화’를 지켜보면서 받은 충격과 두려움이 엄청나다. 미·중 대결 구도 속에 결정적 뇌관의 하나가 된 가운데 ‘지금 당장 독립’ 표명이 얼마나 무리수인지 대만 스스로 잘 알고 있다.
독립 문제와 관련해 대만인들의 속내와 태도는 단순치 않아 가늠하기 어렵다. 국제정치 등이 맞물려 요동치는 등 현지 여론조사 결과 또한 변화 기복이 심하다. 그러나 ‘안정과 번영의 지속을 원한다’가 불변의 보편적 희망이며, 그것을 위한 전제 조건이 지금까지 그랬듯 ‘완벽한 자치’의 향유다.
중국은 친미·독립 성향의 라이칭더 총통 취임 이후 대만을 포위한 대규모 군사훈련 등을 벌이며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다양한 국내외 난관을 애국주의로 돌파해야 할 시진핑 정권으로선 ‘대만 흡수를 통한 하나의 중국 완성’만큼 매력적인 화두도 드물다. 중국의 국내 정치적 사정 내지 일정에 따라 수년 내 대만침공이 현실화될 수 있다는 관측과 우려가 제기된 이유다.
최근 일각에선 미국의 대만 거주 자국민 철수 계획 이야기도 들려 온다. 이런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그린 처장이 “구체적인 대피나 철수 계획은 없다. 논의가 필요한 사건이 없었기에 누구와 이 문제를 논의한 적 없다”고 답했다. 또 미 대선 이후 라이 총통의 ‘미국 경유’ 중남미 방문 예정 보도에 대해 “미국은 그동안 대만 고위 관리들의 경유를 지원해 왔다”며 앞으로도 지속될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이 밖에 지난주 이뤄진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방중 결과에 대해서 말했다. 그린 처장은 “미국과 중국이 대만·우크라이나 문제, 첨단기술 수출 통제 등 여러 현안에서 이견을 보이지만 미국은 미·중 관계를 책임감 있게 관리할 자신이 있다”며 “가까운 미래 미·중 관계에 큰 변화는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방중 당시 설리번의 긴장된 표정과 희색이 만면한 중국 측 인사가 한 컷에 찍히며 초래된 갖가지 상상을 불식시키는 말로 풀이할 수 있다.
이런 가운데 미국의 역내 전략상 중요축인 일본에서 눈길을 끄는 뉴스가 전해졌다. 지난달 중국 군용기의 일본 영공 침범 당시 중·일 방위 당국 간 핫라인이 가동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고 도쿄신문이 복수의 외교 소식통을 인용해 5일 보도했다. 양국 방위 당국 간 핫라인은 우발적 충돌을 막기 위한 전용회선이다. 시 주석과 기시다 후미오 총리 회담에서 합의돼 작년 5월부터 운용되기 시작했다.
신문에 따르면 그동안 핫라인이 교류행사를 위한 용도로 활용됐을 뿐 유명무실한 수준이었다. 중국군 Y-9 정보수집기가 지난달 27일 나가사키현 단조(男女)군도 앞바다 영공을 약 2분간 침범했을 때, 앞서 7월 일본 해상자위대 호위함 ‘스즈츠키’의 이례적인 중국 영해 진입 때 모두 핫라인이 작동되지 않았다. 일본 당국자는 핫라인 관련 내부 운용 규정과 사용 전 당국 간 협의 절차를 들며 “현 상황에선 (핫라인을 통한) 신속한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고 짚었다. 우발적 충돌을 피하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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