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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인이든 지식인이든 대다수 한국인은 사회과학적 개념, 특히 국제정치학적 개념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결여돼 있는 것 같다. ‘전쟁’과 ‘평화’에 대해서도 분명한 개념을 가지고 있지 못하고, 국제정치가 작동하는 원리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한 가지 현저한 예로 한국 사람들은 평화의 반대말은 전쟁이요 전쟁의 반대말은 평화라고 믿는다. 전쟁은 무조건적으로 나쁜 것이며 평화는 무조건 좋은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런 지경이니 국가의 최고 이익, 즉 생존을 위해 전쟁을 결단해야 할 책임이 있는 대통령이란 사람마저도 ‘아무리 나쁜 평화라도 전쟁보다는 낫다’는 말을 할 정도가 되었다. 이는 문재인 대통령이 했던 말인데 이 말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을 제기한 사람은 대한민국에 몇 안 된다. 필자는 문재인 대통령이 말하는 ‘평화’가 행여나 북한에 대한 ‘굴종’ 혹은 ‘항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를 바란다고 비판했었다.
국제정치학자들은 평화를 전쟁이 달성해야 할 ‘목표’로 보며, 전쟁은 평화를 달성하기 위한 대단히 중요한 ‘수단’ 중 하나로 간주한다. 세계 역사는 그 오랜 흐름을 통틀어 전쟁에서 결정적으로 승리한 나라 혹은 상대방을 결정적으로 패퇴시킬 수 있는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나라라야 평화를 오래 지속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2400년 전 손자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 중 최선(不戰而屈人之兵善之善者也)’이라고 말했고, 2015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선 후보는 자신이 대통령에 당선될 경우 “미국의 군사력을 너무나도 막강하게 증강시킴으로써 아예 전쟁할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약속했었다.
이 같은 전쟁과 평화의 논리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 국민은 110여 년 전 일본에게 나라를 넘긴 이완용을 최악의 매국노라고 비판한다. 이완용이 살아 있다면 어쩌면 자신은 대한제국과는 국력이 상대가 되지 않는 일본에 대해 ‘전쟁보다는 차라리 나쁜 평화를 택한 것’이라고 변명할지도 모르겠다.
당시 대한제국이 어떻게 일본과 전쟁을 치를 수 있었을까. 더 나아가 당시 대한제국의 수장은 고종 황제였는데 왜 총리급인 자신이 책임을 다 뒤집어써야 하느냐며 항변할 것이다. 대한제국이 멸망할 당시 인명의 생사 여탈권마저 가지고 있던 전제적 권력자는 고종이 아니었나. 을사조약으로 일제에 외교권을 넘기는 날 고종은 이토 히로부미에게 “이제까지 경은 천황을 위해 고생했으니 남은 여생은 나를 위해 일해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었나.
조선을 멸망의 길로 끌고 가는 데 누구보다 큰 역할을 한 명성황후가 일본의 칼잡이들(필자가 학교에서 배운 바로는 깡패들) 앞에서 당당하게 ‘나는 조선의 국모다’고 외쳤다는 허구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며 감동하는 2020년대의 대한민국 국민에게는 대단히 어려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하지만 독립기념관 관장 임명을 둘러싸고 대통령의 인사권에 시비를 거는 자들이 국가·국민·독립 같은 난해한 개념들을 가지고 말장난하는 것을 보면 대한민국의 소위 좌파 엘리트들 수준은 고종 시대와 별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어 슬프다.
현 독립기념관장이 “일제시대 우리나라 사람의 국적은 일본이었다”는 발언에 대해 전 독립기념관장이 정면으로 반박했다고 한다. 전 독립기념관장은 “당시 주권을 빼앗겼을 뿐 나라는 계속 존재했는데 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독립이라는 개념도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한다. 전 관장의 ‘주권을 빼앗겨도 나라가 계속 존재할 수 있다’는 발상이 기가 막힌다. 국가끼리 전쟁을 하는 첫 번째 이유는 국제적으로 독립적이고 국내적으로 최고라고 정의되는 권력, 즉 ‘주권(sovereign power)’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남북한 갈등도 국가의 3요소 중 두 가지인 영토·국민에 관한 것이니 곧 주권적 갈등인 것이다.
우리의 선조 국가 대한제국은 1910년 8월29일 일본에 의해 죽었다. 국가의 죽음을 연구한 타니샤 파잘(Tanisha Fazal) 교수는 조선은 1905년 을사조약 시 일본에 의해 폭력적으로 죽음을 당한 나라로 분류한다. 1945년 8월15일 광복된 후 3년째 되는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 대한민국이 못마땅한 세력은 1948년 8월15일을 아주 싫어한다. 그래서 건국절을 말하면 경기를 일으킨다.
35년11개월 빛(光) 없이 살았던 우리는 금년 빛을 되찾은(光復) 79년 기념식을 거행했다. 2045년은 광복 100년의 해가 되는가. 광복절을 앞으로 얼마나 더 오랫동안(수백 년?) 더 기념하려 하는가. 수백 년 기념해야 할 것은 국가의 생일, 곧 건국일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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