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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으로 쓰는 역사 [16] 꽃은 화려하지만 연약한 풀의 운명, 작약
작약꽃 보고 고향 그리워한 제국대장공주
스카이데일리 기자페이지 + 입력 2024-06-17 17:35:57
 
▲ 탐스럽고 색깔 고운 꽃을 피우는 작약은 우리나라를 비롯해 중국·몽골을 아우르는 넓은 지역에서 자란다. 윤상구 사진작가
 
꽃 모양이나 피는 시기가 비슷한 작약과 모란을 같은 식물로 아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두 식물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모란은 나무이고 작약은 여러해살이풀이라는 점이다
 
작약은 함박꽃과도 혼동하기 쉽다. 작약의 작()자에 함박꽃의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식물은 학명이 다른 것은 물론 작약은 미나리아재비과이고 함박꽃나무는 목련과로 생물학적 분류상 과도 다르다.
 
한국·중국·몽골 어디서나 고향의 꽃
 
탐스럽고 색깔 고운 꽃을 피우는 작약은 우리나라를 비롯해 중국·몽골 등 넓은 지역에서 자란다. 작약꽃은 우리나라나 중국·몽골 사람 누구에게나 고향의 꽃인 셈이다. ‘고려사 열전에는 작약꽃을 보고 고향을 그리워한 원나라 제국대장공주의 애달픈 이야기가 실려 있다.
 
충렬왕 235월 원나라에 갔던 왕과 공주가 귀국했는데 때마침 수녕궁에 작약이 만발했다. 공주가 꽃 한 가지를 꺾어 오라 하여 오랫동안 손에 잡고 완상하더니 감회를 못 이겨 눈물을 흘렸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공주는 병이 들어 현성사에서 사망했는데 향년 39세였다.”
 
고려 충렬왕의 왕비 제국대장공주는 칭기즈칸의 손자인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의 딸이다. 제국대장공주의 사망 소식을 들은 원나라 황제 무종은 동헌에 핀 복숭아꽃·오얏꽃 같던 청춘이 찬 이슬 맞은 갈대같이 갑자기 시들었다며 슬퍼했다. 이런 기록들 때문에 많은 사람이 공주의 죽음이 향수병 때문이었을 것이라 미루어 짐작한다.
 
고려의 운명을 크게 움직인 태자 왕전의 결정
 
▲ 꽃 모양이나 피는 시기가 비슷하지만 모란은 나무이고 작약은 여러해살이풀이다. 윤상구 사진작가
 
1231년 시작된 몽골의 고려 침략은 30년 가까이계속되었다. 강화도로 도망친 고려 조정에 몽골은 개경 환도와 고려 왕의 몽골 입조를 끊임없이 요구했다. 견디다 못한 고려는 1259년 태자를 몽골 황제 앞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훗날 고려 원종이 되는 태자 왕전은 남송을 정벌하러 간 몽골 황제 몽케를 만나러 전쟁터로 향했다. 그런데 황제가 있는 곳에 닿기도 전에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때 왕전은 무척 곤란한 지경에 처했다. 몽골의 황제 계승 다툼에 휘말렸기 때문이다
 
당시 몽골에서는 쿠빌라이와 그 동생 아리크부케가 황제 자리를 놓고 다투고 있었는데 왕전은 결국 쿠빌라이를 선택하고 남쪽으로 내려가 그를 만났다. 이는 고려의 운명을 크게 움직인 대단한 결정이었다.
 
당시 몽골의 상황을 봤을 때 황제 자리를 차지할 확률은 아리크부케가 더 높았다. 새로운 황제를 선출하는 회의 쿠릴타이는 몽골 제국의 수도 카라코룸에서 열릴 것이니 몽골 본토에 영토를 가지고 있던 아리크부케가 더 유리할 터였다. 그 상황을 알고 있던 쿠빌라이는 개평부에서 쿠릴타이를 열어 재빨리 황제에 즉위하였다.
 
이처럼 힘든 상황의 쿠빌라이 앞에 그동안 끈질기게 저항하던 고려의 태자가 나타난 것이다. 쿠빌라이는 크게 감동했고 새로운 수도 대도에 입성할 때 왕전과 동행했다. 다음 해 고려 왕 고종이 세상을 떠났을 때 왕전은 황제의 지원을 등에 업은 막강한 권력자가 되어 있었다
 
원종이 된 왕전은 원나라 황제의 지원을 약속받았지만 고려 조정은 여전히 어지러웠고 혼란 중에 왕권까지 위협받았다. 이때 원종의 태자 왕심은 쿠빌라이의 도움으로 100년에 걸친 무신 정권을 물리쳤고 고려 조정은 개경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권세를 떨쳤지만 정략 결혼의 외로운 희생자
 
쿠빌라이는 자신의 막내딸 쿠툴룩켈미시와 고려 태자 왕심을 결혼시켰다. 이때부터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이 되었다. 아시아에서 몽골의 침략을 받고도 왕조를 온전하게 보존한 나라는 티베트와 고려뿐이다
 
티베트는 몽골이 믿는 불교의 종주국으로 인정받았고 고려는 부마국이 된 덕분이다. 이후 원나라에서 여러 명의 공주가 고려로 시집 왔지만 그들은 모두 제후의 딸이었고 황제의 딸은 쿠툴룩켈미시 하나뿐이었다. 그녀는 남편 왕심이 왕위에 오른 후 제국대장공주에 봉해졌다.
 
1297년 제국대장공주가 세상을 떠나자 원나라에 있던 세자 왕원은 어머니의 죽음에 의혹을 품고 고려로 달려왔다. 그리고 후궁들을 비롯하여 아버지 충렬왕의 측근을 모조리 제거하고 원나라로 가버렸다
 
충렬왕은 아들의 처사에 화가 나고 분했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제국대장공주가 죽었으니 충렬왕은 더 이상 원나라 부마가 아니었다. 충렬왕은 결국 쿠빌라이의 외손자이며 떠오르는 태양과 같던 아들에게 왕위를 내주고 태상왕으로 물러앉게 되었다.
 
제국대장공주는 황제의 딸임을 과시하며 남편 충렬왕보다 더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권세를 떨친 황제의 딸이라 해도 머나먼 타국으로 시집와 외롭게 살아야 했던, 정략 결혼의 희생자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기에 작약꽃에 얽힌 기록은 그녀를 향수병을 못 이겨 죽어간, 가련한 여인으로 그리고 있는 것 아닐까. 꽃은 화려하지만 연약한 풀에 지나지 않는 작약의 운명이 역사의 흐름에 휩쓸려 희생된 세도가 여인들의 모습과 어쩐지 닮아 보인다.
 
[글 황인희 사진 윤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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