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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군사들은 막연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연신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걸었다. 길이 심하게 꺾일 때마다 숲의 빛깔이 더 짙어지는 듯했다. 보병의 뒤를 따라 기병이 내리막길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별안간 숲에서 화살이 빗발치듯 쏟아졌다. 화살을 맞은 당나라 기병들이 비명을 지르며 말에서 떨어졌다.
“고구려인의 기습이다.”
누군가의 입에서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외침이 튀어나왔다. 이에 놀란 말들이 날뛰기 시작했다. 당군의 행렬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좁은 산길에서 말들이 서로 부딪치고 뒤엉켰다. 기병들은 말을 진정시키려 애썼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당나라 기병들은 감히 반격할 생각도 못 하고, 그저 말 등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납작 엎드렸다. 그 사이 화살은 더욱 맹렬히 날아왔다.
앞서 나아가던 이해고는 후위의 기병이 고구려군의 습격을 당했다는 전갈을 받고 말머리를 돌려서 달려갔다. 그가 습격이 벌어진 장소에 이르러 보니 적군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화살을 맞아 쓰러진 당군과 말의 사체만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이해고는 분통이 터졌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는 현장을 수습하고 전진을 계속했다. 고구려군의 기습은 한 번에 그치지 않았다. 당군이 협로를 따라 이동하는 동안 그들은 소규모 부대 단위로 끊임없이 출몰하여 괴롭혔다.
좁고 가파른 산길에서는 기병의 움직임이 둔할 수밖에 없었기에 보병을 풀어 적군을 쫓았다. 하지만 번번이 허탕을 쳤다. 이런 일이 계속되자 당나라 군사들은 차츰 지쳐 갔다.
당군이 간신히 천문령의 협로를 빠져나와 보니 전방에 넓은 구릉 지대가 펼쳐져 있었다. 이해고는 일단 시야가 트이자 안심했다. 평지에서의 전투라면 당의 막강한 기병 전력을 활용할 수 있었기에 자신 있었다.
당나라 군대가 전열을 정비하고 다시 진군하려 할 때, 흙먼지가 산등성이를 돌아 몰려왔다. 이해고가 유심히 보니 한 떼의 군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高句麗 大將軍 大祚榮 (고구려 대장군 대조영)
그토록 찾아 헤매던 대조영의 이름이 검은 천위에 황금색 글씨로 선명하게 쓰여 있었다.
이해고의 지시에 따라 당나라 기병들이 함성을 지르며 돌진했다. 견고한 갑옷을 입고 긴 창을 잡은 중무장 기병이 앞서고, 활과 칼을 소지한 경기병이 그 뒤를 따랐다. 여러 전장에서 빛나는 공을 세운 기마군답게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대조영의 군대는 당군의 공격에 맞서 용맹스럽게 싸웠다. 하지만 고구려군은 전력의 차를 극복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고구려군이 등을 보이고 도주하자 당의 기병이 순식간에 따라붙었다.
불과 몇 마장이나 갔을까. 당군이 고구려 군사를 덮치려는 찰나 좌우에서 일시에 수천 개의 화살이 날아왔다. 당군이 화살을 피해 멈칫하는 사이 대조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이를 본 이해고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가슴을 때렸다.
“대조영이 눈앞에서 달아나는데 어찌 이리 머뭇거린단 말이냐!”
이해고는 뒤따라온 경기병에게 활을 쏘게 했다. 수가 월등히 많은 당군의 반격이 시작되자 말갈 군사는 대조영과 반대 방향으로 달아났다. 당군의 수장 이해고는 부장 아목(阿木)에게 말갈군을 쫓게 하고 자신은 대조영을 추격했다.
이해고가 대조영을 잡는 데 정신이 팔려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려 나가자 중랑장 색구는 보병을 이끌고 뒤를 따랐다. 하지만 협곡에서의 복마전으로 이미 지친 상태라 기병과의 거리가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당나라 기병이 산등성이를 돌아 모습을 감추었을 때 갑자기 함성이 울려 퍼지더니 수풀 속에서 고구려 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지친 당의 보병은 고구려군의 공격을 견딜 수 없었다.
수많은 당나라 군사가 고구려 군사들의 창칼 아래 목숨을 잃었다. 이에 놀란 색구는 말머리를 돌려 천문령을 향해 달아났다. 간신히 고개 입구에 도착한 그는 그제야 숨을 돌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다행히 추격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안심한 색구는 고갯길을 오르려 했다.
이때 골짜기에서 한 떼의 군마가 튀어나와 앞길을 가로막았다.
“어디를 가느냐? 나 연철생이 너를 기다린 지 오래다.”
연철생이 오십여 근은 족히 나가는 장창을 들고 색구에게 달려들었다. 기진맥진한 당장은 싸울 의욕이 없었다. 그는 싸우는 척하다가 재빨리 몸을 빼내 달아났다. 이를 보고도 고구려 장수는 쫓지 않았다. 뒤에 남은 당군들은 고구려군의 매서운 공격에 목숨을 잃었다.
한편, 대조영의 뒤를 쫓던 당군은 간간이 나타나 앞길을 가로막는 고구려 군사들 때문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고구려군은 소규모 병력으로 치고 빠지면서 끊임없이 당나라 군사를 괴롭혔다. 이해고는 기병 일부를 차출해 이들을 소탕하게 하고 자신은 계속해서 대조영의 뒤를 쫓았다. 이런 일이 여러 차례 반복되자 이해고의 뒤를 따르는 기병은 수천 기로 줄어들었다.
어느덧 구릉 지대 서편 계곡에 이르렀을 때였다. 앞서 달리던 대조영의 군대가 갑자기 돌아섰다.
“이곳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다. 내 너를 영접하기 위해 준비한 것이 있다.”
대조영은 칼을 빼서 하늘을 향해 들었다. 그러자 계곡 양편에 숨어 있던 고구려 군사들이 일제히 달려 나와 당군을 에워쌌다.
이해고는 그제야 속은 것을 깨닫고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당군은 마치 늑대들에게 둘러싸인 양 떼와 같은 처지였다.
고구려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당나라 군사는 대부분 창에 꿰이거나 칼에 베여 목숨을 잃었다.
이해고는 분하고 억울했지만, 일단은 살고 봐야 했다. 그는 간신히 포위망을 뚫고 달아났다. 그의 뒤를 따르는 군사는 불과 이삼십에 지나지 않았다.
대조영의 계책에 따라 사방에 흩어져 매복하고 있던 고구려와 말갈 군사들은 흩어진 당군의 부대를 각개 격파했다. 이로써 당군을 궤멸시키고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천문령 전투에서 승리한 대조영은 군사와 백성을 이끌고 동모산으로 나아갔다. 그가 당군과 싸워서 대승을 거두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사방에 흩어져 살던 고구려 유민과 주변 여러 부족이 모여들었다.
대조영은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선언하면서 나라 이름을 고려(高麗)라 칭하고 왕위에 올랐다.
하늘의 도우심인지 때마침 북쪽의 돌궐이 군사를 일으켜 거란족을 복속시키고 요서 지역에 그 세력을 뻗쳤기 때문에 당의 무후는 대조영을 치기 위해 다시 군사를 보낼 수 없었다.
대조영은 서로는 돌궐과 손을 잡고, 남으로는 신라와 통교하면서 그 세력을 넓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영토가 사방 5천여 리에 이르고, 가호가 50만을 넘어섰다. 그리고 부여와 옥저 땅까지 아울러 옛 고구려 땅의 대부분을 되찾았다.
대조영은 문무백관을 모아 놓고 자신의 소회를 밝혔다.
“나라를 잃은 후로 어언 20여 년이 흘렀소. 그동안 우리 고구려인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살면서 망국민의 설움을 겪어야 했소. 하지만 어떤 고난과 시련도 우리를 좌절시키지 못했소. 우리는 희망을 잃지 않고 난관을 헤치며 고구려 땅을 되찾았소. 짐은 이처럼 놀라운 일을 해낸 그대들이 자랑스럽소. 저세상에 가서도 떳떳이 조상님을 뵐 수 있을 것 같소.”
대조영은 감격에 겨워 말을 잇지 못했다.
대대로 아불진(阿佛鎭)이 화답했다.
“폐하께서 저희를 이끌어 주시지 않았다면 어찌 가능한 일이었겠습니까.”
주위에 모인 신하들은 대대로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군신 간에 덕담이 오고 가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도 대조영은 경계의 말을 잊지 않았다.
“사람은 모름지기 옛일을 통해서 교훈을 얻어야 하오. 지난날 우리가 겪었던 고난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모두가 합심하여 우리나라를 누구도 감히 넘보지 못할 강국으로 키워야 하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신들은 이 나라와 백성을 위해 분골쇄신(粉骨碎身)하겠습니다.”
신하들은 이구동성으로 결의를 다졌다.
군신이 혼연일체가 되어 착실히 나라의 기반을 다져 나간 덕분에 고려는 동방 천하의 중심 국가로 발돋움했다.
신라 성덕왕(聖德王)은 신하들과 함께 새롭게 태어난 고려 문제를 의논했다.
“고려의 대조영이 우리에게 화친을 청해 왔소.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
중시(中侍) 원문(元文)이 나섰다.
“고려는 고구려의 후신입니다. 당연히 고구려를 멸망시킨 우리에게 원한을 품고 있을 겁니다. 폐하께서는 저들을 경계하셔야 합니다.”
아찬 신정(信貞)은 생각이 달랐다.
“그렇지 않습니다. 소신이 들은 바로는 대조영은 지난 일에 연연할 인물이 아닙니다. 그가 우리에게 화친을 청해 왔다면 같은 동포로서 힘을 합해 당에 대적하자는 뜻일 겁니다.”
“우리가 지난날 당과 대립하기는 했지만 지금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 않소?”
성덕왕이 되묻자 신정이 대답했다.
“나라 간의 관계는 국익에 따라 변하는 법입니다. 지난날 당나라가 신의를 저버리고 우리 땅을 집어삼키려 한 일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아찬은 나당 전쟁 때의 일을 상기시켰다.
원문이 볼멘소리로 물었다.
“그럼 이제 와서 당나라를 저버리고 고려와 손을 잡아야 한단 말이오?”
신정이 코웃음을 쳤다.
“굳이 한쪽을 저버릴 이유가 있소? 한편으로는 당과 교류하면서 은밀히 고려와 손을 잡으면 되오.”
잠자코 듣고 있던 성덕왕이 입을 열었다.
“아찬의 말에 일리가 있소. 고구려와 신라는 한 배에서 나왔으니 굳이 고려를 적대시할 이유는 없소. 그들이 먼저 손을 내밀었으니 받아들이는 게 도리요.”
국왕이 고려와 화친할 뜻을 굳건히 하자 원문도 더는 반대하지 못했다.
이리하여 고려와 신라 양국은 비밀리에 사신을 보내 우호 관계를 맺었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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