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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이의 난세치세(亂世治世)] 광개토대왕릉 비문으로 본 고구려의 역사 강역
박정이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5-20 06:30:20
 
 광개토대왕(374∼413)은 391년부터 413년까지 재위한 고구려의 제19대 왕으로 22년의 재위 기간에 고구려를 정치·군사적으로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그의 최대 업적은 남과 북으로 진출해 일시적으로 위축되었던 고구려의 국력과 영토를 팽창시키고 동아시아의 질서 재편 과정에서 능동적인 대처로 고구려의 국제적 위상을 크게 향상시킨 데 있다. 광개토대왕은 군사적인 우위성을 활용해 ‘선남진(先南進)·후북방(後北方)’의 전략 기조하에 강공책을 구사하면서 동서남북의 전방위 정복 활동을 감행했다.
 
광개토대왕은 군사적으로는 전방위 공략을, 외교적으로는 전방위 외교를 펼쳤다. 그러나 능비문의 기록을 근거로 하면 남쪽을 향한 외교 활동과 군사 작전이 빈번하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남진 정책을 펼친 한 배경으로서 이미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해양이 중요한 활동 무대로 등장했으며 중국 남·북조의 분립은 주변 각국에게 외교 활동의 통로로서 해양의 필요성을 강하게 인식시켰다. 광개토대왕의 남진정책은 대외 관계의 측면, 특히 해양 활동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
 
광개토대왕의 군사작전을 분석해 볼 때, 국가기반체계를 확충한 후 변화무쌍한 대륙 정세를 주도적으로 활용하여 ‘선남진·후북방’의 전략을 채택하고, 대왕의 진두지휘하에 영토 확장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영토를 광범위하게 확장한 이후에는 기동전보다 성곽을 중심으로 한 공성전 위주로 방위 전략을 바꾸고, 군의 기동과 배치 방법에 주안을 두고 거점방어식 초토전술과 단기전 수행의 전략을 구사했다. 또 황해 중부에서 해양 영역의 확보와 탈취를 위해 수군을 이용해 경기만 쟁탈전을 감행하기도 했다.
 
광개토대왕비는 중국 지린성 지안시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비는 장수왕이 아버지 광개토대왕의 훈적을 기리고 고구려 왕릉들을 안전하게 수호하기 위해 건립한 것이다. 또한 고구려의 번영을 가져온 위대한 부왕인 광개토대왕과 신성한 선조 왕들의 권위를 배경으로 자신의 향후 정치적 구상을 펼쳐가고자 하는 의지를 국내·외에 표방하고자 했다. 광개토대왕비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최대(最大)의 금석문으로 국내 현존하는 모든 금석문 중 가장 크기가 크다. 이 비는 다른 시기의 비와는 다른 사면비(四面碑)이다.
 
총 1775자에 이르는 광개토대왕 비문은 내용상으로 크게 3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부(1면 1행∼1면 6행)에서는 건국신화를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다. 시조 추모왕(주몽)부터 대무신왕(대주류왕)까지 3왕의 왕위 계승과 17세손인 광개토대왕의 훈적과 비의 건립 경위가 기록되어 있다. 2부(1면 7행∼3면 8행)에서는 광개토대왕이 즉위 후 수행한 군사 활동과 그 성과를 기술하고 있다. 이 부분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며 비문의 중심을 구성한다. 3부(3면 8행∼4면 9행)에서는 수묘인(守墓人) 연호(煙戶) 330가의 출생지와 수묘인 제도의 문제점, 광대토대왕에 의한 수묘제 개혁에 관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광개토대왕은 재위 20여 년 동안 전방위적인 팽창정책을 진두지휘한 정복 군주로서 영토 확장 정책을 몸소 추진해 나갔다. 특히 남쪽의 신라를 지원하면서 백제와 왜국의 연합 세력을 압박하여 배후 세력을 약화시킨 후 서·북진하면서 요하 유역의 후연을 지향하여 끈질기게 영토 확장을 추진한 것은 강력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전개한 고구려 팽창 전략의 성공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남진 정책으로 백제를 압박하여 한강 유역까지 진출하고, 서진 정책으로 요동을 장악하여 북경 일대까지 진출했으며 북으로는 부여의 농안(農安) 일대, 동으로는 오늘날 길림과 연해주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광개토대왕의 재위 시기에 고구려는 서쪽으로는 요하, 북쪽으로는 개원(開原)에서 영안(寧安), 동쪽으로는 혼춘(琿春), 남쪽으로는 임진강 유역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확보하였다. 광개토대왕 비문에 의하면 20여 년의 재위 기간에 64성을 공파하고 1400개의 촌락을 점령했다.
 
따라서 광개토대왕비의 정복 기사는 정토(征討)의 명분에서 결과에 이르기까지 고구려인의 자존적 국가 의식과 대외 의식을 배경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는 전제왕권의 확립을 통한 고구려의 국가적 성장을 의미하는 것이다. 고구려의 주 정복 대상은 백제와 신라 및 가라·동부여였으며, 왜와 비려는 단지 토멸의 대상일 뿐이었다. 이는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 및 가라·동부여를 왜·비려와는 성격이 다른 동일 세력권 내의 민족 집단으로 인식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광개토왕의 정복전은 한민족사의 발전 과정에서 나타나는 최초의 민족 통일 의지의 표현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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