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 연재소설
우리나라 삼국지 [327] 백제의 부흥운동 ④
바람이 심상치 않습니다
임동주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5-13 06:30:15
 
 
복신이 드러누웠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풍왕은 싸늘하게 웃었다. 병을 핑계로 자기를 유인해서 죽일 작정이라는 것쯤은 금세 눈치챌 수 있었다.
이튿날 아침, 풍왕은 날랜 군사 5백을 거느리고 복신의 집을 철통같이 포위한 다음 기세 좋게 안으로 쳐들어갔다. 복신은 방 안에 누워 있다가 결박당하는 신세가 됐다.
복신은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했다.
지수신의 말을 듣지 않고 저 못난 놈을 살려 둔 게 잘못이구나. 모든 게 나의 불찰이다.”
풍왕은 군사들을 시켜 다짜고짜 복신의 목을 벴다. 그 순간, 날이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장대비가 쏟아졌다. 하늘이 복신의 죽음에 분노한 듯 천둥과 벼락을 내렸다.
풍왕은 백제 부흥군 내의 동요를 최소화하려 했지만 복신을 따르던 무리는 목숨에 위협을 느끼고 몰래 성을 빠져나갔다. 이 때문에 부흥군의 세력은 크게 약화됐다.
 
복신의 죽음을 전해 들은 유인궤는 이를 백제 부흥군 섬멸의 기회로 여기고 대대적인 공세를 준비했다. 먼저 당 고종에게 증원군 파병을 상주하고, 신라 문무왕에게도 사자를 보내 군사를 동원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번에야말로 백제 부흥군의 뿌리를 뽑아 버리겠다는 각오였다.
고종은 손인사(孫仁師)에게 대군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가서 유인궤를 돕도록 했다. 더불어 왕자 융을 함께 보내 백제 부흥군의 사기를 꺾도록 했다. 문무왕은 몸소 정예군을 거느리고 웅진성에 당도해 당군과 합류했다. 이로써 새롭게 결성된 나당연합군은 주류성을 공격할 준비를 마쳤다.
 
이 무렵, 주류성의 풍왕은 나당연합군의 공격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듣고 신하들을 급히 소집했다.
어찌 대응하면 좋겠는가?”
주류성에 머물고 있던 왜장 박시전래진이 날카로운 눈을 번뜩였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곧 여원군신(廬原君臣) 장군이 이끄는 왜군이 도착할 겁니다.”
달솔 귀지가 사기를 북돋았다.
고구려에도 지원을 청했으니 곧 좋은 소식이 들려올 겁니다.”
고구려와 왜의 구원군만 도착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풍왕은 가뭄 끝에 단비를 맞은 풀처럼 금방 생기를 되찾았다. 그는 적군의 동향을 파악하고 전쟁에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하라 명했다.
한편, 백강에서 손인사의 군대와 합류한 유인궤는 곧바로 주류성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성을 함락시키고 풍왕을 사로잡는다면 다른 지역에서 일어난 부흥군도 힘을 잃을 것이었다.
신라 문무왕은 유인궤의 명을 받은 당장 손인사·유인원과 합세해 군대를 이끌고 육로로 나아가 주류성을 포위했다. 유인궤는 별장 두상·부여융과 함께 백강을 지켰다.
주류성에서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이번에는 기필코 백제 잔당을 섬멸하겠다는 나당연합군과 막바지에 몰린 백제 부흥군은 한 치의 양보도 없는 공방전을 펼쳤다. 전투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며칠 후, 고대하던 왜의 구원군이 드디어 도착했다. 이 소식을 들은 풍왕은 한숨을 돌렸다. 이제 수세에서 벗어나 공세를 취할 때였다. 풍왕은 나당연합군이 공격을 멈춘 틈을 타서 박시전래진과 함께 수백의 군사를 거느리고 왜군을 맞이하러 갔다. 내외에서 호응한다면 형국을 단번에 유리하게 바꿀 수 있었다.
풍왕이 백강 가에 도착했을 때는 당군과 왜군이 한 차례 접전을 펼친 후였다. 먼저 도착한 왜의 선발대가 백강을 거슬러 오르다가 강 유역을 지키고 있던 당장 두상(杜爽)이 이끄는 당군의 저지를 받았다. 먼 길을 항해하느라 지친 군사들을 이끌고 싸우는 것이 무리라고 판단한 왜장 간인연대개(間人連大蓋)는 함선을 물리고 여원군신이 이끄는 본대가 당도하기를 기다렸다.
왜군의 대선단이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은 유인궤는 기벌포에 진을 치고 싸울 태세를 갖췄다.
 
풍왕이 박시전래진을 앞세우고 왜군의 대장선에 오르니 간인연대개가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그동안 얼마나 고초가 심하셨습니까.”
왜장의 태도는 매우 극진했다. 그도 그럴 것이 풍왕으로 말하면 두 해 전 돌아간 제명왕이 귀하게 여겼을 뿐 아니라 이번 구원군의 지휘를 맡은 여원군신과도 가까운 사이였다. 여원군신은 새로이 등극한 천지왕(天智王)의 최측근으로 당대를 주름잡는 실력자였다.
원로에 고생이 많았구려. 여원 장군은 언제 당도하시오?”“
한참 전에 선유도를 지났다는 기별이 당도했습니다.”
과연 한나절도 지나지 않아 여원군신이 이끄는 본대가 백강 입구에 도착했다. 본대까지 합류해서 4백여 척으로 늘어난 왜의 군선은 백강 하구 일대를 새까맣게 뒤덮었다.
 
폐하, 소장의 불민을 용서하소서. 사신으로부터 소식을 듣고 당장 달려오고 싶었지만 조정에 매인 몸이라 그럴 수 없습니다.”
이렇게 와 주신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됩니다.”
풍왕은 굳은살이 박인 여원군신의 손을 덥석 잡았다.
풍왕은 여원군신을 비롯한 여러 장수와 함께 나당연합군을 칠 일을 의논했다.
저들이 주류성을 치는 데 전력을 집중하고 있으니 우리는 허를 찔러 기벌포를 공격합시다. 그러면 저들이 당황하여 군사를 물릴 겁니다.”
풍왕의 자신감 넘치는 태도에 여원군신도 보조를 맞췄다.
소장의 생각도 다르지 않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의견 일치가 이루어지자 왜군은 즉시 행동에 나섰다. 왜의 선단은 백강 하구의 당 진영을 공격했다. 그런데 이들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배를 움직이면서 백강의 기상(氣像)을 고려치 않았던 것이다.
백강 유역은 가을에 접어들면 바다에서 내륙으로 강한 바람이 불었다. 그래서 강을 따라 상류로 오를 때는 바람을 받아 쉽게 갈 수 있지만 바다 쪽으로 나오려면 바람을 거슬러야 하기에 항해하기가 어려웠다. 현지 사정에 어두운 왜군은 이를 고려하지 않고 무턱대고 백강으로 들어선 것이었다.
 
유인궤는 방어 태세를 견고히 하여 왜군의 공격을 물리쳤다. 좌군과 우군의 연이은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고 적지 않은 군사를 잃자 약이 오른 여원군신은 직접 본대를 이끌고 백강 하구로 상륙했다. 유인궤는 이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지원군을 보냈다.
드넓은 갯벌 위에서 당과 왜의 군사들이 뒤엉켜 싸우는 모습은 살아남기 위해 진흙과 뒤엉킨 갯것들의 몸부림처럼 처절했다.
풍왕은 박시전래진의 호위를 받으며 배 위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왜군은 온 힘을 다해 전진을 시도했지만 당군 역시 만만치 않았다.
마음을 졸이며 양군의 일진일퇴를 지켜보던 풍왕의 얼굴로 매서운 바람이 들이쳤다.
고물에 서 있던 군사가 외쳤다.
바람이 심상치 않습니다.”
거센 바람이 귓가에서 음산하게 윙윙거렸다.
잠시 후, 대장선의 돛대가 바람에 꺾였다. 이를 본 왜의 군사들은 불안감에 떨며 웅성거렸다.
이때 갑자기 뒤쪽에서 당의 전선이 나타나더니 정박해 있던 왜선을 향해 불화살을 날렸다. 왜선은 작은 규모의 병사 운반용 배였다. 그러므로 전함의 면모를 갖춘 당선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더군다나 당군은 이미 여러 차례 고구려군과 해전을 펼친 경험이 있었다.
당선에서 쏘아대는 불화살을 맞은 왜선은 시뻘건 화염을 일으키며 불타올랐다. 왜군들은 불을 끄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당군은 불화살을 날린 후 덩치가 큰 배로 조그만 왜선을 무자비하게 들이받았다. 당선의 당파(撞破) 공격으로 선체에 손상을 입은 왜선이 서서히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물에 뛰어든 왜군들도 당군이 쏜 화살에 맞아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남은 왜선도 당선의 공격에 놀라 황급히 배를 돌려 피하려 했지만 맞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게다가 배들이 촘촘히 붙어 있어 뱃머리를 돌리기 어려웠다. 사방에서 불길이 솟아오르고 바다는 핏빛으로 변해 갔다. 아비지옥을 연상시키는 참담한 광경이었다.
 
당선의 포위망이 점점 좁혀들자 박시전래진은 풍왕을 돌아보며 다급히 외쳤다.
제가 적들을 막을 테니, 폐하께서는 일단 몸을 피하십시오.”
풍왕은 도리질을 쳤다.
어찌 나 혼자만 살겠다고 도망친단 말인가.”
폐하께서 살아 계셔야 백제를 다시 일으킬 수 있습니다. 지금은 작은 의리를 논할 때가 아닙니다.”
박시전래진은 풍왕의 호위 무사들에게 대장선에 딸린 작은 배를 물 위로 내리게 했다. 그러고는 왕을 떠밀어 배에 태웠다.
제 할아버지 역시 백제인이셨습니다. 제 몸에도 백제인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종종 탈을 쓰고 춤을 추면서 백제 노래를 부르곤 하셨지요. 그 노래가 아직도 귓가에 맴돕니다. 부디 백제를 지켜 주십시오.”
그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허리에 찬 칼을 뽑아 구명선에 연결된 밧줄을 끊었다. 호위 무사들이 노를 젓자 풍왕을 실은 배가 차츰 멀어져 갔다.
 
이때 커다란 당선이 박시전래진이 타고 있던 배를 들이받았다. 그는 칼을 빼들고 당선으로 뛰어들었다. 그의 칼이 허공을 갈랐다. 마치 장군탈을 쓴 광대가 한바탕 칼춤을 추는 듯했다. 어울려 춤추던 당군이 하나둘씩 거꾸러졌다. 한바탕 피바람을 일으키는 향연이 펼쳐졌다. 박시전래진은 쓰러질 때까지 백제 노래를 부르면서 칼을 휘둘렀다.
 
왜군은 백강에서 참담한 패배를 당했다. 당군의 기습 공격으로 선단이 격파되자 상륙했던 군사들은 전의를 잃고 뿔뿔이 흩어졌다. 그 와중에 여원군신을 포함해 많은 장수가 목숨을 잃었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풍왕에게 남은 희망은 고구려의 도움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직접 연개소문을 만나 지원을 청하기로 하고 고구려 땅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기대를 걸었던 왜군이 크게 패하자 주류성에서 항전하던 백제 부흥군은 싸울 의욕을 잃었다. 주류성은 결국 나당연합군의 파상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함락됐다.
유인궤는 여세를 몰아 임존성으로 쳐들어갔다. 임존성을 지키고 있던 흑치상지는 주류성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이미 대세가 기울어졌음을 깨달았다.
내분만 일어나지 않았어도 이리 허망하게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류성이 함락된 데다가 풍왕도 도망쳤으니 누구를 의지해 싸우겠는가. 이제 백제도 끝이구나.”
그날 밤, 흑치상지는 성문을 몰래 빠져나와 당나라 유인궤에게 항복했다.
한편 흑치상지의 배반에도 지수신은 끝까지 임존성에 남아 항전했다. 그리고 성이 마침내 함락되자 수하를 이끌고 고구려로 망명했다. 이로써 마지막 남았던 부흥군마저 소멸하니 유구한 역사를 자랑해 온 백제는 마침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추천해요
0
좋아요
0
감동이에요
0
화나요
0
슬퍼요
0
오늘자 스카이데일리
주요 섹션 기사
주소 : 서울특별시 중구 새문안로 26 청양빌딩 7층 | 전화 : 02-522-6595~6 | 팩스 : 02-522-6597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시 아01703, 등록일 : 2011년 7월 18일, 발행·편집인: 조정진, 편집국장: 고동석
copyrightⓒ2011, All rights reserved. Contact : skyedaily@skyedaily.com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박선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