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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삼국지 [326] 백제의 부흥운동 ③
이참에 풍왕을 몰아내고 옥좌에 오르십시오
임동주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5-10 06:30:20
 
 
사방에서 일렁거리는 불길이 주변을 대낮처럼 밝히고 있는 가운데 술자리의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왕이니 신하니 할 것 없이 모두가 술기운이 오르는지 얼굴이 숯불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복신은 연신 술을 마시는 척하면서 술을 탁자 아래 빈 그릇에 쏟았다.
여러 차례 술동이가 비워지자, 신하들은 몸이 조금씩 기울었다. 복신이 취중 실수인 것처럼 술잔을 정자 밖으로 던졌다. 바닥에 떨어진 술잔이 깨지자 이를 신호로 주변 수풀에 숨어 있던 자객들이 일제히 뛰어나왔다. 호위 무사들이 미처 막을 틈도 없이 정자는 그들에게 장악되었다
 
도침이 풍왕을 지키기 위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자객 하나가 다짜고짜 달려들어 그의 가슴을 찔렀다. 흑치상지가 이를 보고 막으려 했지만 옆에 있던 만지가 가슴에 품고 있던 비수를 꺼내 그의 목을 겨누었다.
장군을 해칠 마음은 없습니다. 가만히 계십시오.”
흑치상지는 상황을 간파하고 낮은 신음을 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왕을 호위하던 무사들은 어느새 피를 뿌리고 쓰러져 있었다. 순식간에 상황이 끝났다. 풍왕과 대신들의 얼굴은 참담하게 굳어 있었다.
 
이때 복신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군신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러분은 아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는 단지 폐하를 기만하고 당군과 내통한 도침을 처치하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배신자를 처단했으니 만사가 제자리를 찾을 겁니다.”
누구도 도침이 적과 내통했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칼자루는 복신이 쥐고 있었다.
복신은 쓰러진 도침에게 다가가 단숨에 수급을 취했다. 이 끔찍한 장면을 본 풍왕은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었다.
복신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도침의 머리를 풍왕 앞에 내던지며 울분을 토했다.
제가 폐하를 왕위에 추대한 것은 오로지 백제의 주권 회복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충정을 저버리고 당의 속민을 자처하시다니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입니다.”
풍왕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무슨 말을 꺼내도 죽음을 면할 수 없을 듯했다.
가까스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풍왕은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무슨 오해가 있었던 것 같소. 도침이 혼자서 저지른 일이오. 나와는 무관하오.”
복신은 풍왕의 변명을 듣고 다소 누그러졌다.
소신은 폐하를 믿습니다. 하지만 다시 이런 일이 있을 시에는 응분의 대가를 치르셔야 할 겁니다. 부디 명심하십시오.”
그는 왕에게 다짐을 받았다.
사위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간간이 장작이 타다가 튀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할 일을 마친 복신은 만족한 표정으로 만지를 돌아보며 말했다.
폐하께서 놀라셨을 테니 침전으로 모시도록 하게. 그리고 여러 대신도 약주가 과하신 듯하니 처소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게 도와드려라.”
군신을 흩어 보낸 복신은 도침의 목 없는 시신을 내려다보며 비아냥거렸다.
네가 정녕 생불이라면 다시 살아나 봐라.”
시신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제 나의 세상이 펼쳐지리라.”
복신이 돌아서서 처소로 가고 있는데 부하 장수 지수신(遲受信)이 따르며 간했다.
이참에 풍왕을 몰아내고 옥좌에 오르십시오.”
복신이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저 나약한 왕은 어느 때고 도모할 수 있다. 지금 손을 쓴다면 부흥군의 사기만 떨어질 것이다. 더구나 곧 당도할 왜의 구원군을 생각하면 당분간은 그가 왕좌에 앉아 있어야 한다.”
 
지수신이 거듭 아뢰었다.
풍왕을 만만히 보셔서는 안 됩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분명 후환이 있을 겁니다. 꼭 제거하셔야 합니다.”
복신이 딱하다는 표정으로 지수신을 바라봤다.
그는 왜 왕이 애지중지하는 자이다. 또한 왜의 실권자인 중대형과도 호형호제(呼兄呼弟)하는 사이다. 우리가 그를 해치면 왜국에서 가만히 있겠느냐.”
지수신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왜가 지원군을 파견하는 이유는 당과 싸워 백제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우리의 의지를 높이 샀기 때문입니다. 사사로운 감정과는 무관합니다.”
복신은 마침내 역정을 냈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그대는 과도히 염려 마라.”
지수신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복신이 사라지자 그는 수하를 보면서 탄식했다.
자고로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다. 기회를 놓치면 대의명분을 잃을 뿐 아니라 오히려 화를 당하게 된다. 우리 장군께서는 어찌 이런 이치를 모르신단 말이냐.”
수하가 지수신에게 권했다.
그리 불안하시면 이참에 고구려로 귀순하시지요.”
지수신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복신 장군은 백제를 살리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계신다. 그런 분을 두고 나 혼자 살겠다고 달아날 수는 없다.”
이날따라 유난히 밤하늘이 어두웠다. 불타는 횃불이 그의 눈동자에 비쳐 일렁거렸다.
 
임존성의 편전 안은 사람들의 동요로 술렁였다. 풍왕을 위시한 대신들의 시선은 복신의 입으로 모여 있었다.
사비성과 웅진성 그리고 금강 동쪽을 제외하고는 우리 영토의 대부분을 수복했습니다. 그러니 이제 새로이 도성을 정하는 게 좋겠습니다.”
복신은 임존성을 떠나 새로운 도성으로 옮기자고 제의했다. 홀로 권력을 휘두르는 그였기에 건의의 형식을 띠기는 했지만 최종 결정이나 다름없었다.
실권이 없는 풍왕은 그의 의견에 반대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번 일을 최대한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이용해야 했다.
좋은 생각이오. 그러면 주류성은 어떻겠소? 그곳은 적의 침입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요충지일 뿐 아니라 우리 백제 부흥군의 발원지가 아니오.”
연회에서 복신에게 수모를 당하던 날, 풍왕은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시해하는 장면을 떠올렸다. 복신은 연개소문과 다를 바 없는 인물이었다. 필요하다면 누구라도 죽일 수 있었다. 그에게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독자적인 세력 기반이 필요했다. 하지만 무왕 때 왜로 보내진 이후로 30여 년을 왜국에서만 살았던 그가 국내에 지지 세력이 있을 리가 없었다. 도침이 죽은 마당에 풍왕이 믿을 건 도침을 추종했던 승병과 신도들이 남아 있는 주류성이었다.
복신이 풍왕의 의도를 모를 리 없었다. 그는 도침을 죽인 후에 그의 수하들을 거두었지만 완전히 믿지는 않았다.
주류성은 험준한 곳에 자리 잡아 방어가 용이하지만 주위의 토지가 척박해 식량을 자급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도성으로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장군은 어디를 염두에 두고 계시오?”
풍왕이 답답한 심정을 감추며 물었다.
피성(避城·김제)이 적당합니다. 그 주변은 토지가 비옥하고 일기가 온순하여 삼한에서도 가장 기름진 땅입니다. 도성으로 부족함이 없을 줄 압니다.”
복신이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렸기에 왕도 토를 달 수 없었다. 대신들 역시 그의 눈치만 살폈다.
그런데 한 장수가 반대하고 나섰다.
피성은 적과 너무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게다가 지대가 낮아 적의 공격을 막아 내기 어렵습니다. 지세가 높고 험해야만 적은 수로 많은 적을 막을 수 있습니다. 굶주림은 후일의 일이지만 성이 함락되는 것은 눈앞의 일입니다.”
그는 왜에서 전황을 살피는 임무를 띠고 파견된 장군 박시전래진(朴市田來津)이었다. 왜의 도움이 절실했기에 복신조차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존재였다.
피성은 서북으로 강이 흐르고 동남에는 높은 진흙 제방이 있어 적의 침입을 막아내는 데 유리하오. 비록 지대가 낮기는 하지만 물길을 이용한다면 적군이 쉽게 쳐들어오기는 어렵소.”
복신이 무 자르듯 쳐내니 박시전래진도 할 말이 없었다.
이리하여 복신은 풍왕을 비롯한 지휘부와 군사들을 이끌고 피성으로 옮겨 갔다. 그가 이처럼 서둘러 천도를 단행한 것은 흑치상지와의 껄끄러운 관계 때문이었다.
흑치상지가 도침을 죽인 일을 내놓고 비난하지는 않았지만 복신에게 불만을 품은 것은 분명했다. 복신으로서는 화근을 끌어안고 있는 셈이었지만 그를 함부로 제거할 수는 없었다. 임존성이 흑치상지의 세력 기반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생각해 낸 것이 피성으로의 천도였다.
이로써 백제 부흥군은 임존성의 흑치상지 세력과 남부 피성의 복신 세력으로 재편됐다.
 
피성으로의 천도가 잘못된 선택임이 밝혀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무열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잠시 주춤하고 있던 신라는 태자 법민이 왕위에 오르면서 전열을 정비했다. 앞으로 문무왕이라 불릴 법민은 아버지의 유지를 잇겠다는 일념으로 상중임에도 백제 정벌을 준비했다. 그런 그에게 풍왕의 천도 소식은 귀가 뜨일 만한 일이었다.
문무왕은 즉시 대군을 동원해 공략에 나섰다. 남부 피성 주위의 거열·거흘·사평·덕안 4개 주가 신라군의 공격에 초토화됐다. 불길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백성의 아우성이 들녘을 가득 메웠다.
신라군은 곧장 피성으로 달렸다. 이에 놀란 풍왕은 급히 대신들과 의논하여 주류성으로 피신하기로 했다. 신라의 대군과 정면으로 붙어 봤자 승산이 없었기 때문이다. 복신 역시 자신의 판단이 틀렸음을 인정하고 중지에 따랐다.
 
우여곡절을 겪고 주류성으로 도성을 옮기게 되자 복신의 굳건했던 지위도 흔들렸다. 피성 천도의 실패로 그의 권위가 손상됐을 뿐 아니라 주류성에 터를 잡고 있던 도침의 남은 세력이 풍왕과 손을 잡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후로 복신에게 눌려 지내던 대신들도 풍왕 쪽으로 돌아서며 만만치 않은 대항 세력을 형성했다.
복신은 자신의 잘못을 만회하기 위해서 웅진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이 지역은 신라와 사비성에 있는 당군의 교통로이자 식량 보급로였다. 이곳을 차지하면 당군의 보급을 차단할 수 있었다. 그리되면 고립된 당나라 군사들은 굶어 죽거나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하늘은 복신을 돕지 않았다. 복신군은 이 싸움에서 당군에게 크게 패했다. 지라성과 윤성을 뺏기고 대산책·사정책 등의 목책을 잃었다. 복신은 할 수 없이 진현성(眞峴城)으로 퇴각해 최후의 결전을 준비했다. 하지만 기세가 오른 당군의 공격을 당해 낼 수 없었다. 진현성마저 잃은 복신은 비참한 모습으로 주류성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기는커녕 패장의 멍에까지 짊어지게 되자 복신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이때부터 풍왕은 노골적으로 그에게 불만을 드러냈다.
복신은 풍왕이 자신을 제거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는 수하들과 모의한 끝에 마침내 왕을 제거하기로 했다.
복신은 칭병하고 자리에 드러누웠다. 풍왕이 문병을 오면 잡아 죽이려고 수십 명의 부하를 무장시켜 집 안 곳곳에 배치했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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