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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삼국지 [325] 백제의 부흥운동 ②
도침 따위 없어진다고 대수겠는가
임동주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5-09 06:30:20
 
 
 
신라 장군 김흠은 탄현을 넘어 사비성으로 가지 않고 고사비(古沙比)로 향했다. 그는 본진을 떠나올 때 문무왕이 내린 밀명을 가슴에 새기고 있었다.
사비성으로 향하는 척하다가 군사를 돌려 주류성을 함락시켜라!”
문무왕은 애당초 당군을 도울 마음이 없었다. 그는 당이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할 때부터 그들의 야욕이 장차 신라에까지 미치리라고 예견했다. 지금 당장은 고구려 때문에 신라를 동맹국으로 대우하고 있지만 고구려마저 정복한다면 그다음 순서는 불을 보듯이 뻔했다. 고구려를 잡는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 노릇을 한 신라 역시 무사하기는 어려웠다.
 
문무왕의 계획은 백제 부흥군과 당군이 서로 얽혀 싸우며 힘을 소진하는 틈을 타서 주류성을 점령함으로써 백제 땅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유인궤의 바람과는 달리 김흠은 고사비성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이 성은 도성을 수비하는 오방성 중 하나로 사비성에서 고부천(古阜川)을 지나 20여 리 떨어진 지점에 있었다.
한편, 주류성에서 군사를 규합한 복신은 신라군이 고사비성에 진을 치자 군사를 이끌고 그곳으로 올라갔다. 복신의 군대가 나타났다는 보고를 접한 김흠은 군사를 거느리고 성 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해서 백제 부흥군과 신라군은 고부천 인근에서 맞붙었다.
김흠의 눈에 비친 백제 부흥군의 모습은 오합지졸이었다. 그는 상대를 얕잡아보고 일거에 격파할 생각으로 군사를 몰아쳤다.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는 신라 정예군의 갑주 사이에 섞인 백제 군사의 모습은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다. 금방 땅을 일구다가 달려 나온 듯한 흙투성이의 해진 옷과 때 묻은 두건이 손에 든 창칼을 어색해 보이게 했다. 간간이 낡은 갑주를 차려입거나 찢긴 비단옷을 입은 자, 심지어는 노획한 당군이나 신라군의 투구를 쓰거나 흉갑이나 군복을 입은 자까지 눈에 띄었다. 이들의 모습은 군대라고 일컫기도 민망했다.
 
하지만 막상 전투가 벌어지자 백제 군사들은 무서운 힘을 발휘했다. 이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신라 군사들에게 달려들었다. 들고 있던 창과 칼이 부러지면 맨주먹으로 싸웠다. 상대의 몰골을 보고 실소를 금치 못했던 신라군도 차츰 긴장하게 됐다. 전장에서 가장 두려운 상대는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않는 자들이지 않은가.
신라의 정예군이 진지하게 전투에 임하자 전황은 신라군의 우세 쪽으로 기울었다. 아무리 목숨을 걸고 달려든다고 해도 최신 무기와 조직적인 훈련으로 다진 정예병을 상대로 버틴다는 건 무리였다. 전열을 정비한 신라군의 파상 공세에 기세가 꺾인 백제 부흥군은 삽시간에 무너졌다. 전의를 상실한 그들은 부리나케 달아났다.
서전에서 승리한 김흠은 백제군의 전력을 얕보았다. 그래서 일거에 잔당을 소탕하고 주류성을 함락시키고자 했다. 그는 달아나는 적군을 맹렬히 추격했다. 백제군은 남쪽으로 도망쳤다.
 
백제군을 추격한 지 이틀 만에 신라군은 우금산(禹金山·부안군 상서면) 초입에 들어섰다. 산길을 따라 오르면 개암사(開岩寺)가 나오고 그 뒤편에 주류성이 있었다.
김흠은 자신감이 넘쳤다. 제아무리 주류성이 요해라고는 하지만, 몸소 부딪쳐 느낀 상대의 전력으로 볼 때 어렵지 않게 함락시킬 수 있을 듯했다. 저 멀리 백제의 패잔병이 힘겹게 산길을 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 뒤로 성곽이 육중한 모습을 드러냈다.
김흠이 군사를 이끌고 개암골로 들어섰을 때였다. 갑자기 산속에서 화살이 쏟아지더니 앞장서 가던 군사들이 끽소리도 못하고 나자빠졌다. 신라 장군은 군사들에게 방패를 앞세워 전진하라고 명했다.
간헐적으로 이루어지던 화살 공격이 멈췄다. 몸을 움직이기 어려울 정도로 좁은 골짜기에 가득 찬 신라군에게는 오로지 전진만이 있을 뿐이었다. 발소리와 거친 숨소리만 들릴 만큼 사방이 적막했다. 창검이 무성하게 자란 나무들 사이로 너울거렸다.
골짜기를 따라가다가 가파른 길에 접어들었을 때 정적을 깨는 쇳소리가 들렸다. 금방이라도 살을 파고들 듯한 짧고 날카로운 소리가 연속해서 들렸다. 신라 군사들은 온몸이 떨려서 자기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김흠은 그 소리를 듣고 소름이 돋았다. 순간 숲속의 나무들이 빽빽해지는 듯하더니 나부끼는 잎 사이로 빛이 반짝였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이 많았네. 하지만 이곳은 신성한 땅이라 더는 갈 수가 없네. 그만 돌아가게. 내 환송은 섭섭지 않게 해 주겠네.”
걸걸한 목소리가 신라 장수를 비웃고 있었다.
김흠이 놀라서 주변을 유심히 살폈다. 숲속에 붉은색 갑주를 입은 건장한 체격의 장수가 서 있었다. 천상에서 내려온 신장처럼 우람한 체격이었다.
김흠은 수하 군사들에게 외쳤다.
저자를 잡아라!”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군사들이 숲속으로 달려갔다.
어리석구나. 생문(生門)을 알려 줬는데, 사문(死門)으로 가려 하다니.”
장수는 크게 웃으며 숲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그를 잡기 위해 달려갔던 군사들은 헛물만 켜고 돌아왔다.
김흠은 그제야 일이 잘못돼 가고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애써 적의 소심한 농간으로 치부했다. ()가 부족하니 속임수를 써서 토벌군을 따돌리려는 수작으로 여겼다.
신라군이 산 중턱에서 한동안 망설이고 있을 때 갑자기 사방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겁에 질려 있던 신라 군사들은 그 소리만 듣고도 놀라서 꽁무니를 빼기 시작했다. 서로 몸을 밀착하고 있던 터라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떠밀려서 넘어지고 깨졌다. 순식간에 대열이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신라 군사가 정신없이 도망치자 때를 기다렸다는 듯 숲속에서 백제 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의 모습은 좀 전에 싸움을 벌였던 오합지졸과는 전혀 달랐다. 눈부시게 빛나는 갑주와 기치가 과거 백제군의 위용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었다. 백제 군사는 날랜 몸놀림으로 신라군을 덮쳤다. 이미 전의를 상실한 신라 군사들은 매의 발톱에 낀 토끼처럼 버둥거리기만 했다.
전세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다다르자 김흠은 달아날 구멍을 찾았다.
너는 이미 독 안에 든 쥐나 마찬가지다. 순순히 무릎을 꿇고 오라를 받아라!”
등 뒤에서 들리는 벽력같은 외침에 신라 장수의 간이 오그라들었다. 그는 뒤를 돌아볼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줄행랑을 쳤다. 신라 군사들의 비명이 그의 뒤를 쫓았다.
김흠이 한참을 도망치다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평지에 이르러 있었다. 간신히 목숨을 건져 도망쳐 온 패잔병의 행렬이 눈에 들어왔다. 머리가 터져 얼굴이 피투성인 자, 한쪽 팔을 잃고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자, 다리에 상처를 입고 저는 자, 갑옷이 찢기고 투구가 벗겨져 산발한 자 등 눈 뜨고 보기 어려운 참상이었다.
김흠은 부하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자신의 무능 탓에 군사들을 사지에 몰아넣고 홀로 살겠다고 도망쳐 온 것이다. 이는 장군의 본분을 잊은 추태였다.
산 어귀를 돌아보니
 
大百濟國 將軍 福信 (대백제국 장군 복신)
 
이라는 황금색 글씨가 새겨진 커다란 깃발이 야유하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분한 마음이 들었지만 더는 싸울 여력이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한시라도 빨리 군사를 물려 신라로 돌아가는 게 상책이었다.
김흠은 적군이 추격해 올 것을 염려해서 황급히 남은 군사를 수습해 뒤도 안 돌아보고 달아났다. 이로써 백제 부흥군은 그 위세를 만천하에 떨쳤고 복신은 유민들의 믿음과 지지를 한몸에 받게 됐다.
 
전화가 뜨겁게 타오르는 중에도 계절은 어김없이 바뀌었다. 어느새 산성에도 찬 기운이 감돌았다. 창 너머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상념에 잠겨 있던 복신은 선뜻한 기운에 옷깃을 여미었다.
이때,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장군, 만지(萬智)입니다.”
복신의 심복인 달솔 만지였다. 그는 주류성에서 군사를 일으킬 때부터 복신과 의기투합하여 늘 함께해 온 동지이자 벗이었다.
그래, 준비는 다 끝났는가?”
, 입이 무겁고 날랜 자들로 준비해 두었습니다.”
복신은 누가 들을세라 목소리를 낮췄다.
이 일이 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서는 안 되네. 자칫하면 우리가 역습을 당할 수도 있어.”
도침 쪽은 아무런 눈치도 못 채고 있습니다.”
그래도 비밀이 누설될 수 있으니 입단속 단단히 하게.”
믿을 만한 자들이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언제 봐도 믿음직스러운 만지였다.
이제 눈엣가시 같은 도침을 더는 볼 수 없겠구나. 제 놈이 배신하고도 무사할 줄 알았단 말이냐.”
복신은 도침의 이름을 되뇌는 것만으로도 부아가 치밀었다.
그런데 흑치상지 장군 쪽이 걱정입니다. 지난번 넌지시 도침을 치자고 제안했을 때 반대의 뜻을 분명히 밝히지 않았습니까.”
흑치상지는 복신과 도침의 갈등 때문에 백제 부흥군이 분열하는 것을 막기 위해 늘 둘 사이를 중재하려 애썼다.
그는 누구의 편도 아니네. 도침이 죽고 난 다음에야 무엇을 할 수 있겠나. 내가 도침을 없애고 그의 수하를 거둬 후하게 대접한다면 마지못한 척 받아들일 걸세.”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만지는 걱정이 가시지 않는지 말끝을 흘렸다.
걱정하지 말게. 민심은 우리 편에 있어. 도침 따위 없어진다고 대수겠는가.”
상대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도침을 따르는 세력이 적지 않았기에 복신 역시 은근히 걱정스러웠다. 임존성뿐 아니라 주류성에 있는 사람들까지 그를 생불(生佛)로 여긴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더욱 도침을 없애야 했다. 그만큼 자신의 앞날에 걸림돌이 될 인물이었다.
 
다음 날 저녁, 부흥군의 승리를 축하하는 연회가 벌어졌다. 신라군의 패퇴로 당군이 움츠리고 있는 사이, 부흥군은 사비성과 웅진성을 제외한 백제 전역으로 세력을 넓혔다. 남부 저항군의 거두인 달솔 여자진(餘自進)과 연계하여 당군을 고립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에 고무된 풍왕이 장졸의 노고를 위로하고 앞으로의 건승을 비는 의미로 연회를 베푼 것이었다.
임존성 내 누각에서 펼쳐진 연회에는 풍왕을 위시해서 도침·복신·흑치상지·귀지·만지 등 신하들이 빠짐없이 참석했다. 풍왕은 만면에 희색을 띠고 그동안 공을 세운 신하들을 치하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복신은 태연한 척 앉아 있었지만 신경은 온통 주변의 움직임에 쏠려 있었다. 자칫 실수라도 하는 날에는 호위 무사들의 칼이 자신에게 날아올 터였다. 도침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왕 옆에 무술이 뛰어난 자들을 배치해 두고 있었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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