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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삼국지 [321] 낙화암 ②
어진 장수는 상대를 죽일지언정 모욕하지는 않는다고 했습니다
임동주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5-01 06:30:17
 
 
가슴 졸이던 백제 대궐의 궁녀들은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백마강 가에 있는 높은 절벽으로 달려갔다. 적군의 노리갯감이 되어 욕되게 사느니 강물에 빠져 죽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막상 우뚝 선 절벽 위에서 굽이치는 강물을 내려다보니 더럭 겁이 났다.
그녀들이 두려워서 울고 있을 때 저 멀리서 나당연합군의 함성이 들려왔다. 이를 들은 궁녀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치마폭으로 얼굴을 가리고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하늘에서 무수한 꽃이 떨어졌지만 짙푸른 강물은 무심히 흘러갔다. 후세 사람들은 궁녀들이 투신한 절벽을 낙화암(落花巖)이라고 불렀다. 이로써 성왕 이후 백제의 도성으로 번영을 누리던 사비성은 외적의 말발굽에 짓밟히게 됐다.
 
사비성 함락 소식을 들은 의자왕에겐 더는 달아날 기운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도성이 함락됐으니 나당연합군이 곧 웅진성으로 들이닥칠 것이었다. 그런데 웅진의 병력이라고 해 봤자 웅진 방령이 거느린 군사 1000여 명이 전부였다. 게다가 지방에 있는 구원군이 온다는 소식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내 지난날 흥수의 말을 듣지 않아 일이 이 지경이 됐구나. 하지만 지금 와서 후회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내일 날이 밝으면 사비성으로 갈 것이니 준비하라.”
백제 군신들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그렇지만 누구도 이를 반대하고 나서지 못했다. 그들은 이미 낭떠러지 끝까지 내몰린 상황이었다.
 
웅진에서 사비성으로 돌아가는 의자왕의 행차는 마치 장례 행렬처럼 음울했다. 누구 하나 입을 열어 큰 소리를 내는 사람이 없었다. 말방울 소리가 무거운 공기를 가르며 일행의 앞길을 인도했다. 언덕을 넘고 하천을 건너는 동안 행렬의 길이는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어느덧 의자왕 일행은 사비성에 다다랐다. 미리 사람을 보내 무조건 항복의 뜻을 밝혔는데도 연합군은 아랑곳하지 않고 성벽의 방비를 철통같이 유지하고 있었다.
의자왕 일행이 성문을 들어서자 당나라 군사들이 양옆에서 따라붙었다. 의자왕은 당군이 이끄는 대로 나아갔다. 곳곳에 보이는 불탄 집과 호기롭게 오가는 당군이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큰길을 지나 다다른 곳은 궁궐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백제의 심장부로서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던 곳이 어느새 황량한 폐허로 변해 있었다.
 
의자왕은 가슴속에서 서러움이 북받쳤다. 조상이 이뤄 놓은 위대한 사직을 자신의 대에 와서 결딴냈기에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피로 얼룩진 돌길을 지나 편전으로 향하는데, 불에 그슬린 전각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저기 깨지고 부서진 흔적이 이곳에서 치열한 격전이 있었다는 걸 일러 주었다.
의자왕은 편전으로 끌려갔다. 소정방은 황금빛 실로 수놓은 갑옷을 입고 거만한 자세로 옥좌에 앉아 있었다.
적장 앞에 선 의자왕은 온몸이 떨리는 것을 애써 참으며 항복 의사를 밝혔다. 소정방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상대를 깔보는 빛이 역력했다.
대총관은 의자왕을 궁중의 내실에 감금하게 하고 삼엄한 경비를 세웠다.
 
며칠 후 의자왕은 소정방의 부름을 받고 갇혀 있던 내실에서 나왔다. 키가 유난히 큰 당나라 장수의 안내를 받아 이른 곳은 편전 앞마당이었다. 그곳에서는 주연이 한창이었다. 대청 위에는 신라의 무열왕과 태자 법민, 그리고 당나라 대총관 소정방을 위시한 신라와 당의 장수가 모여 있었다. 그 아래에는 항복한 백제의 신하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동안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법민이 만든 자리인 듯했다. 곳곳에서 승자의 여유를 담은 파안대소가 터져 나왔다. 전쟁이 언제 있었냐 싶게 활기찬 분위기였다.
 
의자왕은 군사들에게 끌려 당하에 당도했다. 소정방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이는 완전히 무시하는 태도였다. 아무리 패전국의 왕이라지만 이 같은 무례는 도가 지나친 행동이었다.
의자왕은 참을 수 없는 모욕감에 당장 칼을 물고 죽고 싶었다. 하지만 모진 목숨이라도 살아 있어야 훗날을 도모할 수 있기에 애써 참았다. 그런데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술잔이 몇 순배 돈 후에 무열왕이 의자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 자리는 우리의 승전을 축하하고 장병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마련했소. 그러니 우리를 고생시킨 당신이 사죄의 의미로 무릎을 꿇고 술을 따르는 게 어떻겠소.”
일국의 왕으로서 참기 힘든 모욕이었다.
무릇 어진 장수는 상대를 죽일지언정 모욕하지는 않는다고 했습니다.”
김유신이 나서며 이를 만류했다.
무열왕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지난날, 내 딸 내외가 저들의 손에 참혹하게 죽임을 당한 걸 생각하면 아직도 피가 거꾸로 솟소. 이 정도는 약과라 할 수 있소.”
무열왕은 백제왕을 노려보며 억눌렀던 증오를 드러냈다.
 
지난날, 의자왕의 명을 받은 윤충이 대야성으로 쳐들어와 사위 품석을 죽이고 딸마저 자결케 한 사건은 저승에 가서도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무열왕은 그날부터 이십여 년을 하루도 잊지 않고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그리고 드디어 원수를 자신의 앞에 무릎 꿇린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그동안 느꼈던 슬픔과 분노를 고스란히 되돌려주고 싶었다.
소정방은 재밌다는 얼굴로 무열왕의 제안을 지지했다.
의자와 융은 사죄하는 의미로 여기 모인 장수들에게 일일이 무릎을 꿇고 술을 따르도록 하라.”
명색이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 손수 술병을 드는 일조차 체면이 깎이는데, 대청 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무릎을 꿇고 술을 따라 준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시중을 들던 궁녀가 의자왕에게 술병을 건넸다. 국왕과 궁녀의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왕후전의 심부름을 하던 어린 궁인이었다. 의자왕이 달아나고 사비성이 함락되자 적군에게 유린당할 것을 두려워한 수많은 궁녀가 낙화암으로 달려가 몸을 던졌지만 이 아이는 미처 뒤를 따르지 못하고 궁궐에 남아 신라군에게 잡힌 몸이 됐다.
어린 궁녀의 눈가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자신이 하늘처럼 떠받들던 국왕이 이처럼 비참한 처지가 됐으니 놀랍고 슬플 수밖에 없었다.
의자왕은 애써 궁녀를 외면하고 술병을 받아 들었다. 순간, 소정방과 김춘추의 얼굴에 병을 집어 던지고 싶었다. 하지만 질긴 게 목숨이었다. 의자왕은 울분을 참고 무릎걸음으로 돌아다니며 잔마다 술잔을 채웠다. 부왕이 이리 나오니 태자도 어쩔 수 없이 그 뒤를 따랐다.
이들의 참담한 모습을 본 백제의 대신과 장수 대부분이 기가 찬 나머지 눈물을 흘렸다. 이를 보고 나·당의 장수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가운데 오직 유신만은 눈살을 찌푸렸다. 울음과 웃음이 뒤섞인 가운데 사비성의 밤은 깊어 갔다.
이날 무열왕은 과거 대야성 함락 시 백제와 내통한 모척과 검일을 찾아 죽였다. 모척은 본시 백제로 도망친 신라인이었는데 검일과 공모해 양곡 창고에 불을 질러 대야성 함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신라 왕은 적과 내통하면 어찌 되는지 본보기를 보인다면서 이들의 사지를 찢어 죽였다. 이를 지켜본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편 금화는 백제가 패망하고 의자왕이 비참한 꼴을 당하자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서력 660, 시조(始祖) 온조(溫祚) 이래 바다를 제패하여 서로는 산동반도와 진평군을 거느리고, 동남쪽으로는 왜를 속국으로 삼을 정도로 번성했던 백제는 안타깝게도 제31대 의자왕 대에 이르러 멸망하고 말았다.
 
밤의 정적을 깨고 개 짖는 소리가 성벽을 타고 넘어 울려 퍼졌다. 횃불에 비친 그림자가 성벽을 따라 너울거렸다. 군사들의 외침이 사방에서 들끓었다.
성벽을 넘어간다. 놓치지 마라.”
한 군사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십여 명의 사내가 이미 성벽을 넘어가고 있었다. 파수막에 있던 군사가 이들을 향해 활을 쐈다. 하지만 이때는 이미 사내들이 성벽을 넘어 화살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이르러 있었다. 성벽 위의 군사들은 그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빠른 속도로 내달리던 사내들은 추격하는 군사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걸음을 늦췄다.
 
장군, 이제 어디로 가실 생각입니까?”
한 사내가 앞장선 기골이 장대한 자에게 물었다.
웅거하여 적과 맞서려면 임존성(任存城)만 한 곳이 없다.”
임존성은 백제 서부, 봉수산(鳳首山·예산) 정상에 있는 산성으로 규모가 클 뿐 아니라 사방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어 많은 병력을 주둔시키고 적을 막아내는 데 용이했다. 바깥쪽은 석축(石築), 안쪽은 토축(土築)으로 쌓아 견고하고, 가파른 산봉우리가 둘러싸고 있어 접근이 쉽지 않았다. 능히 당의 대군을 맞아 싸울만 한 곳이었다.
폐하께서 당한 치욕을 반드시 되갚아 주리라.”
사내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눈에 핏발이 서 있었다.
저희는 그저 장군의 뜻을 따를 뿐입니다.”
기골이 장대한 사내의 주변에 모여선 자들의 눈에는 그에 대한 믿음이 가득했다. 그가 목숨을 원한다면 기꺼이 바칠 기세였다.
백제는 그리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반드시 저들을 몰아내고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이다. 나 흑치상지(黑齒常之)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
이 사내는 바로 백제의 달솔로서 부흥군의 선봉에 서게 되는 흑지상지였다. 그는 서부 출신으로 키가 7척이 넘고, 담력과 지략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의자왕에게 발탁되어 풍달군 군장으로 있었는데, 의자왕이 웅진성으로 피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휘하 군사를 이끌고 달려갔다. 그는 끝까지 싸우자고 주장했으나 의자왕이 항복을 결정해서 어쩔 수 없이 따랐다. 하지만 왕이 봉변을 당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을 바꿨다. 그는 연합군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수하들을 이끌고 사비성을 빠져나왔다.
흑지상지는 임존성으로 향하는 도중에 당군과 맞서 싸울 군사를 모집했다. 본디 서부는 흑지상지의 근거지였기에 사람을 모으기가 수월했다.
이 무렵, 풍문을 통해 사비성에서 있었던 나당연합군의 만행이 백제 전역에 전해졌다. 점령군은 곳곳에서 약탈을 자행하고 여자라면 가리지 않고 겁탈하는가 하면 조금이라도 반항하는 기미가 보이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창칼로 찔러 죽였다. 이 참담한 소식을 들은 백제 사람들은 비로소 나라가 망하면 백성도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들은 마수가 뻗쳐오기를 앉아서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점령군의 횡포에 분노한 백성은 여기저기서 백제 부흥의 기치를 내걸고 맞섰다. 그러다 보니 서로 힘을 합쳐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믿고 따를 만한 구심점이 필요했다. 이때 그들의 주목을 한몸에 받은 인물이 바로 흑치상지였다.
 
흑치상지가 임존성에 자리를 잡자 소문을 듣고 전국 각지에서 뜻있는 사람들이 찾아왔다. 백성의 뜨거운 호응으로 열흘도 지나지 않아 그 수효가 3만을 넘어섰다.
처음에는 임존성의 군사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소정방도 흑치상지를 중심으로 하여 전국 각지로 백제 부흥 운동이 확산하자 불안감을 느끼게 됐다.
임존성으로부터 시작된 부흥 운동은 백제의 멸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많은 지방 세력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남잠성(南岑城)과 정현성(貞峴城)에서 봉기가 일어났고, 좌평 정무(正武)가 두시원악(豆尸原嶽)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나당연합군에 저항하는 움직임은 시간이 지날수록 전국으로 확대되어 갔다.
소정방은 이를 내버려두면 나중에 큰 우환거리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의 구심점인 임존성에 대한 공격을 준비했다. 이곳만 함락시키면 다른 지방의 저항군 역시 의욕을 잃고 항복해 오리라 여긴 것이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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