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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삼국지 [320] 낙화암 ①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리면 그다음 차례는 신라가 될 겁니다
임동주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4-30 06:30:20
 
 
노을이 강물을 물들일 무렵, 신라 장군 김문영(金文永)이 이끄는 선봉군이 백강 하류에 자리한 당군 진영에 도착했다. 문영은 진영을 유심히 살폈다. 백제군의 저항이 심하지 않았는지 큰 피해를 보지는 않은 것처럼 보였다.
 
문영은 당군이 기벌포(伎伐浦)를 쉽게 통과했다는 첩보에 크게 놀랐다. 기벌포는 금강 하구 일대로 서해에서 사비성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중요 관문이었다. 그래서 동성왕 대에는 주변에 성을 쌓아 외침에 대비했다. 사비 도성 시대에 와서는 이를 증축하고 군사의 수도 늘려서 수비를 더욱더 강화했다. 게다가 이곳은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고 넓은 개펄이 펼쳐져 있어 아무리 날랜 군대라도 상륙하기가 쉽지 않았다.
 
어찌 이제야 당도하는 거요? 대총관의 진노가 이만저만 크신 게 아니오.”
문영이 대총관의 막사에 이르자 당나라 장군 동보량(董寶亮)이 나와서 걱정스럽게 말을 건넸다.
이때 막사 안에서 호통이 터져 나왔다.
저 신라 장수 놈을 당장 포박하라. 내 군법의 무서움을 일깨워 주리라.”
당나라 군사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문영을 결박해 무릎 꿇렸다.
막사에서 나온 소정방(蘇定方)은 문영을 잡아먹을 듯 노려봤다.
네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작전에 차질을 빚었다. 군령을 어겼으니 엄벌에 처해도 할 말이 없겠지!”
문영은 상대의 고압적인 태도가 못마땅했지만 당장은 고개를 숙이고 들어갔다.
황산벌에서 백제군의 저항이 예상보다 거세서 지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구차한 변명은 들을 필요도 없다. 앞으로 이런 일이 없도록 저놈의 목을 베어 본보기로 삼아라.”
대총관의 명령이 떨어지자 장검을 빼 든 군사가 앞으로 나섰다. 문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전장에서 적군과 싸우다 죽는 것도 아니고, 신라를 도우러 온 당군의 손에 죽는다 생각하니 허탈했다.
높이 치켜올렸던 칼이 떨어질 찰나 문영은 원통한 마음에 몸을 뒤틀었다. 이를 지켜보던 신라 군사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만 동동 굴렀다.
이때 참수를 집행하던 군사가 놀라서 칼을 떨어뜨릴 정도로 커다란 외침이 들려왔다.
 
멈춰라!”
주변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소리 난 쪽을 향했다. 그곳에는 분노로 눈썹이 치켜 올라간 유신이 보검의 손잡이에 한 손을 올려놓은 채 서 있었다. 그는 당장에라도 칼을 뽑아 들고 달려와 대총관의 목을 벨 기세였다.
소정방은 겁에 질려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유신은 한 걸음씩 천천히 걸어서 소정방에게 다가섰다.
대총관, 황산벌 싸움을 보셨소? 사정도 모르면서 늦은 것만 문제 삼으니 이는 죄 없는 신라군을 모욕하려는 의도로밖에 볼 수 없소. 더구나 신라 장수를 함부로 처형하는 것은 우리 폐하를 능멸하는 처사요. 나는 이를 절대 묵과할 수 없소. 당장 당군과 일전을 치른 후에 잘잘못을 따지겠소.”
유신의 선포는 절대 허튼소리가 아니었다. 그는 당장 소정방의 목줄을 딸 기세였다. 신라 대장군이 대총관의 코앞까지 다가갔는데도 당군 중 누구 하나 나서서 막는 자가 없었다.
겁을 집어먹은 동보량이 소정방에게 다급히 속삭였다.
제가 들으니 김유신은 한번 뱉은 말은 주워 담지 않는다 하더이다. 이대로 있다간 불의의 사태가 일어날 듯합니다. 백제의 도성을 눈앞에 두고 내분을 일으킨다면 폐하의 기대를 저버리는 일입니다.”
 
소정방도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지 않았다. 그 역시 유신이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걸 익히 알고 있었다. 만일 이곳에서 양군의 충돌이 일어난다면 백제가 숨을 돌릴 수 있는 틈을 주는 것이었다. 그리되면 당군은 별 소득 없이 군사를 물리는 최악의 사태를 맞이할 수도 있었다.
소정방은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짐짓 근엄한 얼굴로 말했다.
내 그대들의 노고를 생각해서 이번만은 용서하겠소.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주의하시오.”
대총관은 무안한지 헛기침을 하면서 도망치듯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유신은 문영에게 달려가 포박을 풀어 주었다.
고생 많았네.”
문영은 몸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대장군께서 당군을 반대한 이유를 이제야 알겠습니다. 저들은 우리를 동맹군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리면 그다음 차례는 우리 신라가 될 겁니다.”
여우를 잡으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 하지 않나. 우리도 그때에 대비해야 할 것이네.”
유신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는 이치를 새삼 절실히 느꼈기 때문이다.
 
나당(羅唐) 연합군은 사비성 앞에 펼쳐진 소부리 벌판에 다다랐다. 의자왕은 다급한 마음에 좌평 각가(覺伽)를 보내 항복의 뜻을 밝히고 철군을 청했다. 하지만 소정방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승리를 눈앞에 둔 상황에서 순순히 물러날 군대는 없었다.
당군 진영에서는 사비성을 공격할 준비가 한창이었다. 운제·충차·투석기 등을 손보는 군사들의 손길이 분주했다. 이번 전투를 위해 특별히 제작한 공성용 병기였다.
이때 갑자기 하늘에서 괴상하게 생긴 새 한 마리가 나타났다. 생김새는 꾀꼬리 같았지만 그 깃털이 검고 머리에 유난히 긴 볏이 달려 있었다. 새는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며 진영 위를 맴돌았다.
이를 보고 불안해진 소정방은 복사(卜仕)를 불렀다. 이 당시 당군은 전투에 앞서 길흉을 점칠 점쟁이를 대동했다.
대총관의 명에 따라 점을 친 복사는 심각한 얼굴이 되어 조심스럽게 아뢰었다.
꾀꼬리는 본디 누런색인데 검은색이라는 것은 분명 상사(喪事)가 일어날 징조이고, 머리에 볏을 달았다는 것은 진중(陣中)에서 으뜸인 자를 의미합니다. 이를 두루 살피면 진중의 원수가 해를 입는다는 계시입니다.”
소정방은 이 말을 듣고 더럭 겁이 났다. 진중의 원수라면 자신을 지칭하는 말이 아닌가. 그는 자기 목숨이 위태롭다는 말을 듣고 쉽게 군사를 움직일 수 없었다.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진격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를 이상히 여긴 유신이 소정방을 찾았다. 대총관은 막사에 있는 간이침대에 머리를 싸매고 누워 있었다. 얼핏 보니 몸이 아픈 것 같지는 않았다.
유신이 큰 소리로 닦달했다.
한시가 급한데 어찌 이리 뜸을 들이시오? 백제의 지방군이 세력을 결집해 구원하러 오기 전에 사비성을 함락시켜야 하지 않겠소.”
소정방은 마지못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유신을 힐끗 보더니 언짢은 기색을 보이며 대꾸했다.
일단은 사비성의 동태를 살피도록 합시다. 이번 대전은 매우 중요하니 신중을 기해야 하오.”
 
전날까지만 해도 자만심이 가득했던 자가 이처럼 소극적으로 나오자 유신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가 아무리 시기의 중요성을 강조해도 소정방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설득에 실패한 유신은 답답한 마음에 막사를 나왔다.
동보량이 다가오더니 넌지시 일러 주었다.
대총관께서는 상서롭지 못한 징조 때문에 두려워하고 계십니다.”
자초지종을 들은 유신은 기가 막혔다. 대군을 이끄는 장수가 자신의 목숨을 아껴 승리를 얻을 기회를 흘려보내고 있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대장군은 하늘을 쳐다봤다. 새가 하늘 높이 날고 있다가 어느 순간 쏜살같이 하강해 사람들 머리 위를 스치듯 지나갔다. 그런 동작을 반복하는 것을 본 유신은 신검을 뽑아 들고 기다렸다. 새가 가까이 날아오자 그는 단칼에 두 동강이 내 버렸다. 몸이 두 쪽이 난 새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피 한 방울 튀지 않을 만큼 깨끗한 솜씨였다.
어찌 한갓 미물 때문에 하늘이 허락한 때를 놓치려 하는가. 천군에게 상서롭지 못할 게 뭐가 있겠는가.”
유신은 소정방이 들으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대총관은 크게 부끄러웠다. 대의를 들어 꾸짖는 유신 앞에서 자신은 너무도 보잘것없는 존재였다. 다시 기운을 낸 소정방은 진군 명령을 내렸다. ·당연합군은 네 길로 나누어 사비성을 향해 접근했다.
 
전의를 상실한 백제의 의자왕은 상좌평 천복(千福)을 시켜 다시 화의를 청했다. 하지만 소정방은 일언지하에 이를 물리쳤다. 다급해진 의자왕은 왕자들과 여섯 명의 좌평을 내보내 항복의 뜻을 밝히고 군사를 물려 달라 간청했다. 소정방은 이 역시 시간을 벌기 위한 술책이라 여기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연합군이 성 앞에 당도하자, 의자왕은 싸움을 포기하고 피신하는 쪽을 택했다. 그는 태자 효()를 비롯한 근신들과 함께 몰래 성을 빠져나와 웅진성으로 도망쳤다. 졸지에 버려진 사비성 백성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적군의 포위망 속에 남겨진 그들은 비겁하게 달아난 의자왕과 대신들을 저주했다. 하지만 마냥 울분만 토하고 있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이대로 항복하여 적군의 노리개가 되느냐, 목숨을 걸고 끝까지 싸우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이때 수습을 자처하고 나선 사람이 바로 의자왕의 둘째 아들인 태()였다. 그는 항상 형인 효가 태자가 된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장자라는 것 말고는 무엇 하나 특출한 점이 없는 위인이었다. 왕자 태는 이번 기회를 빌려 부왕에게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고 싶었다.
국왕의 배신에 치를 떨던 백성은 끝까지 자신들을 버리지 않은 왕자 태에게 호감을 품었다. 이러한 감정들이 하나로 뭉쳐 그를 국왕으로 추대했다. 비록 의자왕이 웅진성에 자리 잡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제 사비성 백성에게는 그가 유일한 임금이었다.
왕자 태는 몸을 사리지 않고 사비성 곳곳을 뛰어다니며 수비 태세를 살피고 군민을 격려했다. 아무리 많은 군사가 쳐들어온다 해도 군민이 합심하여 막아 낸다면 쉽게 무너질 리 없었다. 지방의 지사(志士)들이 군대를 일으켜 달려올 때까지만 버티면 충분히 희망이 있었다.
 
왕자 태의 진두지휘 아래 일심동체가 된 사비성의 군민은 끈질기게 성을 공격해 오는 연합군의 협공을 잘 막아 냈다. 그 와중에도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자가 있었다. 바로 태자 효의 아들인 문사(文思)였다. 그는 숙부인 태가 마음대로 왕위에 오른 것에 앙심을 품고 있었다.
문사는 주변 사람들에게 발버둥쳐 봐야 연합군을 이기기 어렵다고 말했다. 만에 하나 그들을 물리친다 하더라도 의자왕이 돌아오면 왕자 태를 국왕으로 추대한 사람들은 무사하지 못할 거라고 겁박했다. 목숨을 건질 길은 적군에게 항복하는 것뿐이라고 떠들고 다녔다.
몇 차례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막아 내기는 했지만 그 기세에 놀란 사람들은 문사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항복해야 한다는 쪽과 싸워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이 갈렸다. 힘을 합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이처럼 의견이 나뉘니 ·당연합군의 대규모 공격을 견뎌 낼 턱이 없었다.
 
결국 문사는 제 뜻을 따르는 사람들을 이끌고 성문을 열고 나가 연합군에게 항복했다. 이를 지켜본 왕자 태의 심정은 참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로써 남은 군민도 크게 흔들렸다.
왕자 태는 한시도 성벽을 떠나지 않고 목청을 돋우며 군사들을 독려했다. 하지만 내분 탓에 승패의 추는 연합군 쪽으로 점차 기울었다.
마침내 충차로 인해 성문이 깨지고, 운제를 타고 오른 나당의 군사들이 성벽을 점령했다. 왕자는 달려드는 적병을 보고도 물러날 줄을 몰랐다. 자신의 몸을 던져서라도 도성이 함락되는 것을 막아 내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단 며칠 동안 왕좌에 앉아 있었지만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마음은 어느 임금 못지않았다.
그의 심정을 잘 아는 호위 군사들은 온 힘을 다해 연합군의 창칼을 막아 냈다. 하지만 그래 봐야 오래 버티기는 어려웠다. 혼전 끝에 남문이 무너지자 성안에 있던 왕자 융()과 상좌평 천복은 저항을 포기하고 항복했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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