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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삼국지 [318] 황산벌 전투 ③
이곳은 백제를 지키는 마지막 보루다!
임동주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4-26 06:30:20
 
 
유신은 잠시 수하 장수들을 둘러보더니 지시를 내렸다.
품일 장군은 좌군을 맡고 흠순은 우군을 맡도록 하라. 백제군이 손쓸 틈 없이 일거에 몰아쳐야 한다. 절대 진격 속도를 늦춰서는 안 된다.”
진군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렸다. 신라군은 목책을 공격하기 위한 충차를 앞세우고 기세 좋게 적진을 향해 내달렸다. 그런데 얼마 못 가서 앞서 달리던 충차와 기병이 백제군의 거마창에 가로막혔다. 이에 보병이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그들도 앞으로 나아가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였다. 달리던 군사들이 발을 움켜쥐고 쓰러지는가 하면 비명과 함께 함정 속으로 사라지기도 했다.
신라 군사들이 놀라서 땅바닥을 살펴보니 수많은 마름쇠가 깔렸고, 여기저기에 구덩이가 파여 있었다. 함정에 빠진 군사는 죽편(竹片)과 녹각목(鹿角木)에 사지가 꿰여 죽었다.
 
신라군이 장애물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백제군의 목책에서 화살이 마구 날았다. 미처 대응할 여유가 없었던 신라 군사는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신라군은 목책 근처에는 가 보지도 못하고 많은 사상자를 냈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유신은 급히 퇴각을 알리는 징을 울렸다. 그렇게 해서 돌아온 군사들을 헤아려 보니 그 피해가 작지 않았다.
흠순이 말을 타고 유신에게 달려왔다. 그는 분한 듯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아니, 어찌 싸움을 시작하기도 전에 퇴각 명령을 내린단 말이오.”
무모한 공격은 아군의 희생만 키울 뿐이다.”
퇴군한 군사 중에는 마름쇠에 발이 찢기거나 화살을 맞아 고통스러워하는 자가 부지기수였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살풍경이었다.
싸움하다 보면 희생을 감수해야 할 때도 있지 않소.”
네 말이 맞다. 하지만 쓸데없는 희생은 피해야 한다.”
이때 품일이 달려와 아뢨다.
이번 전투에서 죽거나 다친 자가 수백이 넘습니다. 저들의 방비가 예상보다 굳건하여 쉽게 뚫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유신은 백제 진영을 유심히 살폈다.
대열을 정비하고 다시 진격을 준비토록 하라.”
흠순이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금방 무모하다고 하지 않았소?”
이제 적이 설치해 둔 장애물의 위치를 알았으니 이를 피해서 목책으로 접근할 수 있다. 저들이 승리에 들떠 방심한 틈을 노리면 될 것이다.”
대장군의 지시가 계속되었다.
목책을 돌파한 후에는 백제군의 본영을 향해 공세를 집중한다. 지휘부를 흔들면 적군의 결집이 약화될 것이다.”
명령이 떨어지자 품일과 흠순은 각기 부대를 정비하고 다시 전장으로 달려 나갔다.
유신은 떠나는 군사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만일 시간의 여유가 있었더라면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무리한 작전을 펼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소정방과 약조한 날짜가 눈앞에 닥쳐 있었다. 제 때에 사비성에 도착하려면 무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내달리는 신라군의 발소리가 지축을 울렸다.
 
신라군이 순식간에 목책 근처까지 접근하자 백제 군사들은 연거푸 화살을 쏘아댔다. 계백은 적군이 다시 쳐들어오리라 여겼기에 대비하고 있었다. 앞서 진격하던 신라 군사가 화살에 맞아 쓰러졌다. 하지만 그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전진을 거듭했다. 밀물처럼 밀려오는 적군을 상대하느라 궁수의 손이 바빠졌다.
신라군이 점차 목책에 가까워지자 계백은 군사들을 독려했다.
이곳은 백제를 지키는 마지막 보루다! 여기서 막지 못하면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른손을 못 쓰게 되면 왼손으로 활을 당기고, 왼손마저 못 쓰게 되면 입으로라도 시위를 당겨라!”
그의 외침은 백제 군사들에게 힘을 불어넣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군사들이 다시 힘을 냈다.
목책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신라군이 충차를 몰아 목책에 부딪혀 오자 백제 군사가 준비해 둔 기름을 끼얹고 불을 놓았다. 신라 군사 역시 백제군을 향해 화살을 쏘면서 악착같이 달려들었지만 목책을 넘지 못했다.
공방전은 해가 질 때까지 계속됐다. 백제군의 수비는 무너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날이 저물어 가자 신라군 본영에서 퇴군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렸다. 신라군은 많은 사상자를 남긴 채 물러났다.
 
전투가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계백은 충상과 상영을 본영으로 불러들였다. 두 장수가 막사로 들어오자 그는 물을 권한 후 침착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비록 두 차례 전투에서 신라군의 예봉을 막아 내기는 했지만 적의 주력은 여전히 건재합니다. 야음을 틈타 기습해 올지도 모르니 군사들이 경계를 풀지 않도록 주의를 환기하시오.”
두 장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이 정면 돌파에 실패했으니 다른 방법을 강구하지 않겠소?”
충상의 물음에 계백이 기다렸다는 듯이 새로운 작전을 내놓았다.
아마 저들은 정면을 공격하는 척하다가 측면을 노릴 겁니다. 그렇다면 분명 좌영을 목표로 할 겁니다. 상영 장군은 서쪽 숲속에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신라군이 쳐들어오면 후위를 공격하십시오.”
그는 신라군이 펼칠 수 있는 모든 작전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해야 했다.
장군들이 명령을 받들고 나간 후 계백은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연이은 신라군의 공격을 막아 내기는 했지만 그 때문에 백제군이 입은 타격도 상당했다. 이대로 공격이 계속된다면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는 이 전쟁에서 살아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처자를 자신의 손으로 죽인 뒤로 그 역시 죽은 목숨이었다. 그에게 남은 소명은 백제 전역에 흩어져 있는 군사들이 사비성으로 집결할 때까지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
계백은 슬픔과 원망이 가득했던 아내의 눈망울을 떠올렸다. 가슴을 칼로 난도질하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그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애써 고통을 참았다. 이제 아내와 자식들에게 돌아갈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자신을 달랬다.
계백의 예상대로 신라군은 측면 공격을 감행했다. 품일의 부대가 목책 앞에서 상대의 시선을 끄는 사이 흠순의 부대가 백제군 좌영의 왼쪽 측면으로 파고들었다. 매복하고 있던 상영의 군사들은 신라군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후위를 무섭게 공격했다.
기습에 당황한 흠순의 군사들은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하천 쪽으로 밀려났다. 이를 본 백제 좌영의 군사들은 일제히 뛰어나가 신라군을 무찔렀다. 양쪽에서 협공을 당한 신라 군사는 혼비백산하여 군기조차 버린 채 달아났다.
유신은 연이은 패배에도 의연했다. 하천의 서쪽 편에 대한 기습이 여의치 않자 이번에는 동쪽 진영으로 공격을 집중했다. 그렇지만 이 역시 계백과 충상이 이끄는 백제군의 반격에 실패로 돌아갔다.
어느새 해가 기울고 황산벌에 어둠이 내렸다. 벌판을 가득 메웠던 함성과 비명은 온데간데없고, 벌레 우는 소리만이 밤의 적막을 흔들었다.
 
이미 해가 떠올랐는데도 신라군 진영의 분위기는 어두웠다. 사비성에서 당군과 합류하기로 약조한 날이 이미 지났지만 그들은 여전히 황산벌을 벗어나지 못했다.
신라 군사들은 새로운 전투를 위해 도열했지만 여러 번 겪은 실패로 사기가 땅에 떨어져 있었다.
흠순은 자존심이 강한 만큼 명예를 소중히 여겼다. 이대로 가다가는 그들 형제가 패배의 오명을 뒤집어쓸 뿐 아니라 백제를 제압할 수 있는 모처럼의 기회가 날아갈 수 있었다. 나라와 가문의 명예를 지키지 못한다면 살아 돌아간들 의미 없는 목숨이었다.
흠순은 결심을 굳히고 아들 반굴(盤屈)을 불렀다.
반굴이 말을 몰아 부친에게 다가왔다.
신하 된 자로서 최고의 덕목은 충()이며, 자식 된 자로서는 효()이니라. 나라가 위험에 처했을 때 목숨을 바치는 것은 충과 효를 모두 이루는 길이다.”
반굴은 금세 그 의미를 깨달았다. 이미 지치고 사기가 꺾인 신라 군사를 일깨우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했다. 아버지는 그 역할을 자신이 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분부에 따르겠습니다.”
그 역시 아군이 어려운 상황에 빠졌고 이를 헤쳐 나갈 돌파구가 필요하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창을 들고 말안장에 앉으니 두려운 마음이 앞섰다.
이 길로 떠나면 다시 돌아올 수 없다고 생각하니 어여쁜 아내와 얼마 전에 태어난 어린 아들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금방이라도 말머리를 돌려 금성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그러나 반굴은 곧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어깨에는 나라와 가문이라는 무거운 짐이 지워져 있었다. 그는 상념을 떨쳐 버리기 위해서 말의 배를 힘껏 걷어찼다.
 
반굴이 혈혈단신으로 뛰어들어 오자 백제군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쏠렸다. 5만 대군이 뚫지 못했던 철벽에 단기필마로 달려드니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신라군의 움직임이 없는 것을 확인한 계백은 수십 명의 군사를 보내 그를 생포해 오게 했다. 그를 사로잡아 적의 속셈이 무엇인지 캐낼 생각이었다.
목책을 나온 백제 군사들이 에워싸자, 반굴은 창을 휘두르며 맞서 싸웠다. 순식간에 서너 명의 군사가 창에 찔려 목숨을 잃었다. 전우의 죽음을 보고 눈이 뒤집힌 군사들은 생포하라는 명령도 잊은 채 사정을 두지 않고 적장에게 달려들었다. 화랑도 내에서 무예가 뛰어나다는 평을 듣던 그였지만 실전 경험이 부족한 상태에서 많은 적군에게 에워싸였으니 무사하기 어려웠다. 반굴은 온 힘을 다해 분전했지만 결국 사방에서 날아오는 창에 꿰여 말 위에서 떨어졌다.
이를 지켜보던 계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자신의 명령이 제대로 수행되지 않은 것도 문제지만, 이 때문에 쥐 죽은 듯 조용하던 신라군 진영이 술렁였기 때문이다.
계백은 신라군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오랜 행군과 연이은 패전으로 떨어진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 혈기왕성한 장수를 제물로 던진 것이었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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