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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삼국지 [317] 황산벌 전투 ②
저들은 대군이니 우회보다는 정면 돌파를 시도할 것입니다
임동주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4-25 06:30:20
 
 
계백은 아내를 끔찍이 아꼈다. 하지만 주저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녀가 치욕과 예속의 구렁텅이로 들어가게 할 수는 없었다.
아이들을 데려오시오.”
계백은 성희와 운희, 두 딸을 두고 있었다. 둘은 시문과 수예에 뛰어났고 아름다웠다. 갓 태어났을 때는 언제 크나 했는데 어느덧 처녀티가 날 정도로 자라 있었다. 그는 아이들을 보면서 세월의 급물살을 실감했다.
남편의 목소리가 사뭇 비장하게 들렸기에 부인은 아무것도 묻지 못하고 하녀를 시켜 두 딸을 데려오게 했다.
 
잠시 후 우산을 받쳐 든 하녀를 대동하고 두 처녀가 나타났다. 보름달 같은 자태 때문에 사방이 환해지는 듯했다.
이를 본 계백의 가슴속에서 다시 동요가 일었다. 그는 힘겹게 마음을 다잡았다.
활달한 성격의 운희가 떨어지는 빗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부친 앞으로 달려왔다.
비가 많이 내려요. 어서 안으로 들어가세요.”
아버지가 거나하게 취한 줄 알고 한쪽 팔을 부축했다.
계백은 딸의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 놓으며 아내에게 말했다.
오늘 출정하오. 이번에 가면 다시 돌아오리라는 보장이 없소.”
사씨 부인과 두 딸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외적이 쳐들어왔다는 소문을 듣기는 했지만 사태가 이리 심각한지는 모르고 있었다.
장군은 얕은 신음을 토하며 말을 이었다.
지금 백제는 미증유의 위기에 처해 있소. 당과 신라의 대군이 쳐들어오는 상황에서 아군은 승리를 기약할 수 없소. 만일 이번 싸움에서 패한다면 사비성 또한 온전치 못할 것이오. 그리되면 당신과 아이들은 저들에게 잡혀 능욕을 당하게 될 것이오. 살아서 치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내 손에 죽는 게 낫지 않겠소.”
계백은 자신의 결심을 말했다. 현명한 사씨 부인이 이를 못 알아들을 리 없었다.
당신의 뜻이 그러하다면 소첩도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아직 앞길이 창창합니다. 어찌 죽음을 강요할 수 있겠습니까.”
자식을 생각하는 어머니의 애처로운 마음이었다.
이때, 가만히 듣고만 있던 성희가 입을 열었다.
부모의 뜻을 따르는 것이 자식이 도리라 배웠습니다.”
운희의 생각은 언니와 달랐다.
어찌 그런 나약한 말씀을 하십니까. 적은 군사로 전쟁에서 이긴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미리부터 포기하고 스스로 목숨을 버리다니요. 소녀는 차라리 나가서 싸우다 죽겠습니다.”
그녀는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전쟁터는 너와 같은 여자아이가 나설 곳이 아니다. 이 아비를 부디 용서하여라. 내세에 다시 만나 부녀의 연을 맺자꾸나. 그때는 내가 네 자식으로 태어나 오늘의 빚을 몇 곱절로 갚으마.”
계백은 울컥 치미는 울음을 애써 참으며 칼을 뽑아 들었다. 의자왕이 하사한 보검이 곡성(哭聲)을 내면서 칼집을 벗어났다.
계백은 뒷걸음질치는 운희의 배를 찔렀다. 제 죽음을 세상에 알리려는 듯 그녀의 입에서 구슬픈 비명이 튀어나왔다.
이를 본 성희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마치 빗소리라도 감상하는 듯 평안한 표정이었다. 칼을 맞은 그녀는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앞으로 고꾸라졌다.
다음은 사씨의 차례였다. 부인은 자식들의 시신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흐느꼈다.
장군의 갑옷을 따라 빗물이 흘러내렸다. 마치 갑옷이 울고 있는 듯했다.
내 곧 따라가리다.”
빗줄기를 가르며 칼이 날았다. 칼날이 사씨의 목을 벴다.
순간 계백은 부인과 눈이 마주쳤다. 슬픔과 원망이 교차하는 눈빛이었다.
장군은 한동안 정신이 나간 듯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칼에 맺힌 피가 빗물에 씻겨 내려갔다. 하녀들은 겁에 질려서 비극의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비가 더욱 세차게 내렸다.
시신을 거두어 양지바른 곳에 묻어 줘라.”
계백은 하녀들을 향해 나지막하게 말하고 자리를 떴다.
대문을 빠져나가는 장군의 등이 유난히 움츠러들어 보였다.
 
황산(黃山) 아래 연산천(連山川)을 따라 펼쳐진 벌판에서 백제 군사들이 목책을 세우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높다란 목책이 차례로 세워지면서 백제의 진영이 윤곽을 드러냈다. 좌우의 산자락에 의지해서 하천을 사이에 두고 3개의 진영이 세워졌다. 진영을 오가며 군사들을 독려하는 장수의 외침이 산자락을 타고 퍼져 나갔다.
달솔 상영이 막사 안으로 들어섰을 때 좌평 충상(忠常)과 계백이 머리를 맞대고 작전을 의논하고 있었다.
충상이 상영을 보자마자 다급하게 물었다.
척후병은 당도했소?”
신라군이 이미 두계천(豆溪川)을 건넜다고 합니다.” 
두계천에서 황산벌까지는 한 식경도 안 걸리는 거리였다.
충상이 계백을 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과연 지금의 병력으로 신라의 대군을 막아낼 수 있겠소?”
황산벌은 신라군이 사비성에 이르는 길에 남은 마지막 보루입니다. 이곳의 지형이라면 적은 병력으로도 많은 군사를 대적할 수 있습니다.”
황산벌은 구수병법(仇首兵法)에서 말하는 적을 상대할 때 유리한 지형 중 하나인 협로에 해당했다.
좌평의 걱정은 여전했다.
상대는 지략이 뛰어나기로 소문난 김유신이오. 그들이 두계천에서 남쪽으로 우회하여 벌곡으로 넘어간다면 낭패가 아니겠소.”
신라군의 진로와 당군의 움직임으로 볼 때 저들의 전략은 분명합니다. 우리의 지방군이 결집하기 전에 사비성을 함락시키려는 겁니다. 당군이 이미 기벌포에 들어왔다면 신라군 또한 서둘러 사비성으로 진격하려 할 겁니다. 저들은 대군이니 우회보다는 정면 돌파를 시도할 것입니다.”
상영은 새삼 계백을 쳐다봤다. 그는 이미 전세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계백은 충상과 상영에게 각각 좌ㆍ우군을 맡기고, 자신은 중군에 자리했다.
목책이 완성되면서 진영이 갖춰지자 계백은 군사들을 집결시켰다. 도성 수비대 중 늙거나 병든 자, 식솔을 부양해야 하는 자를 빼고 선발한 5천의 정예 군사였다.
결전의 날이 다가왔다!”
장군의 비장한 목소리가 군사들의 귀를 파고들었다. 이들의 얼굴에는 긴장한 빛이 역력했다.
동맹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오랑캐의 군대를 끌어들인 신라를 어찌 용서할 수 있겠는가. 지난날 고구려의 을지문덕 장군은 적은 수의 군사로 수나라의 백만 대군을 물리치지 않았느냐. 비록 아군이 신라군보다 병력이 열세이긴 하지만, 목숨을 걸고 싸운다면 능히 이길 수 있다. 눈에 보이는 적을 두려워하지 말고 나가서 싸워라! 너희의 이름은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계백의 연설은 짧았지만, 깊은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백제 군사들은 장군이 결사의 의지를 보이기 위해 가족까지 베고 왔음을 알고 있었다. 그의 비장한 각오가 이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장군의 뜻에 화답하는 군사들의 함성이 황산벌에 진동했다.
 
신라군이 황산벌에 이르렀을 때 백제군은 전열을 정비하고 싸울 태세를 갖춘 상태였다. 하천을 따라 세워진 목책과 거마창이 우후죽순처럼 곳곳에 솟아 있었다.
유신은 적진을 보고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탄현을 넘었을 때만 해도 이번 작전이 순조로우리라 여겼다. 혹시라도 백제군이 탄현을 지키고 있었더라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더구나 소정방과 약속한 시간에 사비성에 도착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예상대로 백제군은 탄현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제 이곳 황산벌만 지나면 사비성까지 단숨에 당도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백제군이 버젓이 길목을 막고 있었다.
 
백제군의 수효가 그리 많지 않으니 단숨에 격파하는 게 상책입니다. 대총관과 약속한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장군 품일(品日)은 덕적도의 약조를 상기시켰다. 7월 열흘에는 기벌포에서 남하한 당군과 사비성에서 합류해야 했다. 그래도 유신은 묵묵부답이었다.
무얼 그리 망설이시오. 이대로 주저하다가는 소정방에게 공을 모두 빼앗기게 된단 말이오.”
무례하게 다그친 사람은 유신의 아우인 흠순(欽純)이었다. 모두가 형을 두려워하고 공경해도 그만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만큼 사람을 대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서두른다고 될 일이 아니다.”
유신은 흠순의 입을 막았다. 그는 아우의 호탕하고 곧은 성격을 좋아했다. 하지만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독단과 공명심은 그대로 보아 넘길 수 없었다.
그런다고 물러날 흠순이 아니었다.
당장 출군을 허락해 주시오. 내 단숨에 백제 놈들을 쓸어 버리리다.”
일이 그리 간단치 않다. 저 앞에 지형을 봐라. 백제군이 진을 치고 있는 쪽으로 갈수록 길이 좁아지지 않느냐. 저들은 군사는 적지만 유리한 지형을 얻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전력의 우위를 십분 활용할 수 없게 됐다. 함부로 들어갔다가는 큰 피해를 면치 못한다.”
유신이 타일러도 흠순은 여전히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이때, 품일이 끼어들었다.
그렇다면 남쪽으로 우회하실 생각입니까?”
벌곡으로 우회하려면 너무 많은 시간이 소요될 거요. 신속히 빠져나간다 해도 적을 배후에 두는 결과를 초래하니 좋은 방책이라 할 수 없소.”
흠순이 참지 못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면 어찌하시겠단 말씀이오?”
유신은 사나운 눈초리로 아우를 쳐다봤다. 흠순은 급히 고개를 숙이고 딴청을 피웠다.
지금으로서는 황산벌을 지나는 수밖에 없소. 다만, 군세의 우위만을 믿고 무턱대고 달려들어서는 안 되오. 저들이 진영을 3개로 나누었으니 우리도 군사를 3대로 구성하는 게 좋겠소.”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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