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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나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77] 영어 이름을 지어 주세요
사람의 이름, 해독할 수 없는 암호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4-24 06:30:10
 
 
- 우리나라 간호사가 이곳에 처음 파견되었을 당시는 인력이 한참 모자랄 시기여서 시신 닦는 일부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들었지만, 내가 도착했을 때는 선배 간호사들이 10여 년간 신뢰를 구축한 뒤였습니다. 덕분에 나는 동양인이라거나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고 그들과 동등한 자격으로 일했습니다. 다만 비스바덴에 온 지 한 달쯤 지났을 때 병원 측에서 한국 간호사들에게 영어나 독일식으로 이름을 바꿔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명령은 아니었지만 그들에겐 갑순·점례 하고 부르는 게 쉽지 않았나 봅니다.
 
이름은 부모님이나 가문이 후손에게 지어 주는 것인 줄만 알았습니다. 할아버지께 꾸중을 들으면서도 나는 내 이름을 스스로 지어 보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름을 바꿔 달라는 병원 측의 요구는 참으로 이상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거울 앞에서 라라·엘리자베스·캐서린하고 소리 내어 불러 보았습니다. 아름다운 발음이었지만 남의 신발을 얻어 신은 듯 불편했습니다. 내가 이름을 정하지 못하는 사이 점례는 마리아가 되었고, 옥순은 소피아가 되었으며, 영자는 나타샤가 되었습니다.
 
에바의 노트에서 눈을 뗀 나는 운명을 선택해야 한다는 절박함도 잊고 내가 알고 있던 이름, 영화 해바라기의 배우 소피아 로렌과 전쟁과 평화의 나타샤를 떠올렸다. 그리고 점례의 이름 마리아는 그 아이의 혓바닥을 연상시켰다.
 
왜 내 이름은 하필 무훤이에요?”
 
나도 내 이름이 싫었다. ‘넌 무어니?’ 아이들은 발음만 가지고 유치하게 놀렸고 난 유치하게 상처받았다. 나는 무얼까. 그때부터 질문이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 나팔꽃이나 흰눈썹황금새와 같이, 이유가 분명한 이름조차 이름은 이름만을 한정하지 않았다. 이름은 그 사람의 이마를, 그의 눈썹을, 그의 목소리와 그의 냄새를 불러왔다. 그러나 이름은 소유할 수도, 해독할 수도 없는 암호 같았다. 나는 내 이름을 해독하고 싶었고 이왕이면 근사하길 원했다. 그런데 내 이름엔 빛이 없었다. 환하지 않은 이름이었다.
 
너는 고작 네가 알고 있는 없다()라는 한 가지 의미에 갇혀 있는 거야. 네가 아는 것이 그것뿐이기 때문이지. 제대로 모르니까 아이들을 설득하지 못했고 너 자신도 자긍심을 갖지 못하는 거다. 하지만 용맹하다()·춤추다()·힘쓰다()·풍족하다()·어루만지다()·아름답고 훌륭하다()·무성하다()와 같이 다양한 뜻의 한자가 모두 라는 소리를 갖고 있단다.”
 
아버지가 말했다. 그러고는 사인펜으로 내 공책에 큼직큼직하게 한자로 내 이름을 썼다.
 
네 이름은 네가 생각하던 것과 전혀 반대다. 풍족할 무()와 밝을 훤(). 태양의 빛과 기운이 풍족하다는 뜻이란다.”
 
아버지의 설명은 열광적이었지만 스스로를 뿌듯하게 할 뿐 내겐 궤설처럼 들렸다. 아버지가 나를 설득하지 못한 건 그의 역설대로, 나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내가 눈부신 인생을 살게 되리라, 아버지 스스로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만약 내 삶에 빛을 채워주고 싶었다면 근엄하기만 했던 부정(父情) 속에 나를 처박아 두어서는 안 되었다. 나를 茂晅이 아니라 無晅으로 몰아간 사람은 아버지였다. 내가 지금 눈을 잃고 어둠 한가운데 서게 된 것 역시, 이름 때문일지 몰랐다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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