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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삼국지 [315] 서해의 낙조 ③
이는 여우를 쫓아내기 위해 호랑이를 끌어들이는 일입니다
임동주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4-23 06:30:20
 
 
대장선의 이물 위에는 금실로 수놓은 갑옷을 입고 금빛 투구를 쓴 백발의 장수가 서 있었다. 관록이 느껴지는 풍모와 깊은 눈매는 그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웅변해 줬다.
태자 전하, 당선이 백제 해군의 감시를 피해 덕물도(德物島) 뒤쪽 섬 그늘에 숨어 있다고 합니다.”
상대등께서는 여전히 당군과의 연합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가 봅니다.”
이는 여우를 쫓아내기 위해 호랑이를 끌어들이는 일입니다.”
갑판 위에서 대화하는 두 사람은 바로 신라의 대장군이자 상대등인 김유신과 태자 법민(法民)이었다.
유신은 수부들을 향해 외쳤다.
노를 저어라! 섬으로 접근한다!”
신라의 선단이 섬 모퉁이를 도니 길어진 섬 그림자 속에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당나라 배가 떠 있었다. 13만의 대군이 움직였다 하니 족히 수천 척은 될 것이었다. 태자의 배는 호위선 사이를 지나 당의 선단을 향해 다가갔다. 신라의 대장선이 접근해 오자 당선들은 일제히 길을 열어 주었다.
 
당의 대장선은 용선으로 5층 높이에 규모가 크고 화려했다. 선체가 큰 배는 겉으로는 위협적으로 보이지만 서해처럼 수심이 얕고 섬이 많을 뿐 아니라 해안의 굴곡이 심한 곳에서는 기동력을 발휘하기 어려웠다. 자칫하면 좌초하거나 전복될 위험이 있었다.
법민과 유신이 용선으로 건너가 갑판 위에 내리니 당나라 장수들이 도열한 모습이 보였다.
형님, 어서 오십시오.”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인문이었다.
그는 당나라 장수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왔다.
애 많이 썼다.”
법민은 아우의 손을 덥석 잡았다. 오랜만에 낯선 곳에서 조우(遭遇)하니 반가움이 더했다.
인문이 태자 뒤에 선 유신을 보고 말했다.
상대등이 되셨다죠. 경하드립니다.”
얼마 전 상대등 금강(金剛)이 타계한 후 그가 최고의 관직에 올랐는데 가야계 귀족으로서는 최초였다. 이는 가야계가 신라 귀족 사회의 주류에 편입되었음을 알리는 일대 사건이었다. 유신의 조상이 백여 년 동안 품어 온 숙원이 풀린 것이었다.
 
그래, 대총관은 어디 있는가?”
유신은 탐탁지 않은 어조로 물었다. 그는 앞장서서 당을 끌어들인 인문이 못마땅했다.
인문은 개의치 않고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선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유신은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일국의 태자가 오는데 일개 장수가 나와서 맞이하지 않는다는 건 예법에서 크게 벗어난 일이었다.
법민은 유신의 얼굴색이 변한 것을 눈치챘다.
지금은 우리가 고개를 숙여야 할 처지이니 무조건 참으셔야 합니다.”
태자의 충고에 유신은 애써 마음을 진정시켰다.
 
인문은 법민과 유신을 대총관의 선실로 안내했다. 대총관 소정방은 널찍한 방 안에 놓인 육중한 탁자 앞에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뒤로 수하 장수들이 병풍처럼 시립해 있었다. 그는 일흔을 바라보는 노구였지만 평생을 전장에서 보낸 백전노장답게 기백이 넘쳤다.
신라의 태자와 상대등께서 당도하셨습니다.”
인문의 말을 듣고서야 소정방은 고개를 들어 선실 입구를 쳐다봤다.
소정방과 눈이 마주치자 법민은 예를 갖추어 환영의 뜻을 표했다.
원로에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소정방은 가볍게 손을 들었다. 알겠으니 기다리라는 뜻이었다. 실로 무례하기 짝이 없는 반응이었다. 그런데 화날 일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어찌 신라 국왕이 직접 마중 나오지 않았나?”
소정방의 방자한 태도에 유신은 속에서 불덩어리가 치밀어 올랐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인문이 유신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눈짓을 했다.
국왕께서는 이미 남천정(南川停)에 당도해 계십니다. 대총관께서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으시면 받으신 수라상도 물리고 달려오실 겁니다.”
법민은 소정방의 비위를 맞췄다. 이 말을 듣고 대총관의 굳었던 얼굴이 대번에 풀렸다. 상대등도 화를 누르고 작전 회의에 들어갔다.
 
유신이 먼저 백제를 칠 묘책을 내어놓았다.
백제군의 주의를 분산시킨 후 의외의 공격을 한다면 저들은 힘 한번 써 보지 못하고 무너질 것이오.”
소정방도 유신의 작전에 동의했다. 그의 말대로 한다면 쉽게 승리할 수 있었다. 역시 오랜 세월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장수다웠다. 이 때문에 유신을 바라보는 소정방의 시선도 달라졌다.
장군의 말대로라면 분명 백제군의 눈을 속일 수 있을 것이오. 그렇다면 내 7월 열흘에 기벌포에 이를 테니, 신라군도 때를 맞춰 당도해 주시오.”
오만한 소정방이 유신의 뜻에 군말 없이 따르자 인문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뒤에 붙은 말은 다시 그의 가슴을 졸아들게 했다.
기일을 꼭 지켜야 하오. 만약 그대들이 늦어져서 작전에 차질이 생긴다면 군율로 다스릴 것이오.”
이는 자기 부하에게나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유신은 불편한 마음으로 선실을 빠져나왔다.
 
신라 배로 돌아온 유신은 법민을 보며 불만을 터뜨렸다.
아무리 우리가 당의 도움을 받는 처지라지만 일개 장수가 일국의 태자를 이리도 욕보일 수 있단 말이오!”
저도 당장 뒤돌아 나오고 싶었습니다. 이런 취급을 받으면서 계속 저들과 작전을 함께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태자도 참고 있던 울분을 쏟아 냈다.
당 고종은 무열왕을 우이도행군 총관으로 삼아 대총관 소정방의 휘하에 두었다. 신라군을 속국의 군대로 취급하면서 주도권을 쥔 것이었다.
우리가 당군과 힘을 합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케 한다면 그다음은 신라의 차례가 될 겁니다. 언젠가는 저들과 싸울 날이 올 테니 만반의 준비를 해 둬야 합니다.”
유신은 당군의 개입이 후일 신라에 위협이 될 거란 걸 간파했다. 그래서 당에 도움을 청하는 걸 반대했던 것이다. 비록 백제가 힘에 부치는 상대이기는 했지만 국론이 분열되고 혼란에 빠진 상태였기에 신라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이길 수 있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인문이 쐐기를 박듯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상대등께서는 우리의 힘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계십니다. 고구려와 백제가 지금보다 더 긴밀하게 협조하여 공격해 온다면 내일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지금 신라와 당은 서로의 힘이 꼭 필요합니다. 감정싸움으로 일을 그르쳐서는 안 됩니다.”
법민은 유신을 다독이듯 말했다.
저도 걱정이 없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폐하께서 이미 결정하셨는데 이제 와서 왈가왈부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 내 오늘 당장(唐將)에게 받은 모욕은 절대 잊지 않을 겁니다.”
순간 유신은 한없이 유해 보이기만 했던 태자에게서 뜨거운 불꽃을 느꼈다. 어쩌면 그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사람은 법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법민과 유신의 얘기를 들으면서 인문 역시 마음이 불편했다. 마치 맨손으로 칼날을 잡고 있는 듯했다. 그 역시 물러나고 싶었지만 한번 뽑은 칼을 집어넣을 수가 없었다. 돌아갈 수 없는 바다를 건넜으니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비록 길잡이 역할에 불과한 실권 없는 부총관이지만 자신의 입지를 최대한 이용해서 신라에 유리한 방향으로 전쟁을 이끌어가야만 했다. 그는 자의든 타의든 역사의 소용돌이에 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득량만 앞바다가 붉은빛으로 넘실거렸다. 흥수(興首)는 바위 위에 앉아 멀리 있는 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때야말로 모든 근심을 잊고 대자연의 경이로움을 온전히 느끼는 순간이었다. 하염없이 바다를 보고 있노라면 조정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쟁이 한낱 불장난처럼 무의미하게 여겨졌다. 밀물이 있으면 썰물이 있듯이 자연의 순리를 받아들이면 만사가 편한 법이었다. 그런데 어리석은 자들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욕심만 내세우니 갈등과 혼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흥수는 먼저 떠난 성충을 떠올렸다. 늘 나라만 생각하며 임금에게 간언을 거듭하던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더는 방관만 할 수는 없었다. 그 역시 의자왕의 무모한 전횡에 신물이 났다.
흥수는 자신의 충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국왕 앞에 나아갔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남해 바닷가 벽촌으로 쫓겨나게 됐다.
호송하는 군사들의 감시를 받으며 이곳에 처음 도착했을 때는 가슴이 답답할 정도로 막막했다. 천관산 자락을 지나서 맞닥뜨린 파도는 모든 게 끝났다고 되뇌고 있었다.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산자락의 오두막은 감옥이나 다름없었다. 천지가 온통 그를 옥죄는 듯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체념을 배웠다. 체념은 욕심을 버리는 일이었다. 그러고 나니 세상이 달리 보였다.
 
흥수가 여느 때처럼 바다의 풍경을 보며 상념에 빠져 있을 때,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고요한 바닷가를 진동시켰다. 돌아보니 오두막 앞에 서너 필의 말이 달려와 멈춰 서고 있었다.
도성에서 데리고 온 하인이 나와서 그들을 응대했다. 흥수는 멀리서 그들의 모습을 지켜봤다. 잠시 몇 마디 말이 오가는가 싶더니 하인이 다급히 주인에게 뛰어왔다.
어르신, 왕명이랍니다. 어서 댁으로 가십시오.”
흥수는 순간 자신이 죽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왕의 사자가 갑자기 나타난 것은 불길한 징조였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간 흥수는 사자를 방으로 인도했다. 방 안에 자리를 잡자마자 사자가 다급히 말을 꺼냈다.
 
큰일입니다. 지금 당과 신라가 연합하여 우리나라로 쳐들어오고 있다고 합니다. 폐하께서는 좌평 어르신의 고견(高見)을 듣고 싶어 하십니다.”
상황을 자세히 들은 흥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폐하께서는 성충이 옥중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기억하지 못하시나 보구나.”
무슨 말씀입니까?”
적은 수의 군사로 대군을 막아 내기 위해서는 지형의 이점을 이용해야 하오. 지난날 성충이 말하기를 적이 침입해 오면 육로로는 탄현을 넘지 못하도록 하고, 수로로는 기벌포를 지나지 못하게 하라 했소. 이 두 곳은 지형이 험준해서 적은 군사로도 적의 대군을 막아 낼 수 있소. 탄현과 기벌포만 굳게 지켜 낸다면 먼 길을 달려온 적군은 고전할 수밖에 없소.”
사자는 흥수의 말을 주의 깊게 새겨들었다.
 
폐하께서 어르신의 계책을 따르신다면 곧 사비성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겁니다.”
존경과 위로의 마음이 전해졌다.
흥수는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되면 좋겠구려.”
부디 몸을 보중하소서.”
사자는 말에 올라 총총히 사라져 갔다.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하늘과 바다를 붉게 물들인 노을은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선 백제의 암담한 미래처럼 처량하게 보였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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