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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삼국지 [314] 서해의 낙조 ②
이제 누구도 백제의 패망을 막을 수는 없다
임동주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4-22 06:30:20
 
 
유신은 원행을 다녀온 며느리를 맞듯이 살가우면서도 격식을 갖춰 금화를 맞이했다.
위명만으로도 사방 천지를 떨게 하시는 대장군을 이렇게 뵐 수 있어 영광입니다.”
나 역시 너의 명성은 익히 듣고 있었다. 직접 이리 보니 경국지색(傾國之色)이란 말이 무색하구나.”
소녀처럼 미천한 것을 부르신 이유가 있을 줄 압니다. 지체할 시간이 없는 듯하니 어서 말씀하십시오.”
유신은 금화의 담대한 태도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이때까지 이처럼 그를 당황하게 한 사람은 없었다.
과연 듣던 대로 상대를 꿰뚫어 보는 눈을 가졌구나. 뜸 들이지 않고 말하마. 내 들으니 네가 앞날을 보는 능력이 있다고 하더구나. 그 힘을 나라를 위해 써 보지 않겠느냐?”
소녀는 한낱 무녀입니다. 어찌 그런 능력이 있겠습니까. 설사 있다 한들 천기를 함부로 누설할 수는 없습니다.”
금화가 정색하자, 유신은 호탕하게 웃었다.
걱정하지 마라. 천기를 누설할 일은 없다. 사실 내가 빌리고자 하는 건 너의 그 담대한 성격과 뛰어난 미모니라.”
대장군은 자신의 구상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우리 신라는 지금 백제의 끊임없는 침입으로 위기에 처해 있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저들의 힘을 약화시켜야 한다. 빈틈없는 의자왕도 미인에는 약하다고 하니 사비성으로 가서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라. 그럴 수만 있다면 저들의 내분을 불러일으켜서 안으로부터 무너뜨릴 수 있다.”
금화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명()이었다. 신라에서 보낸 첩자라는 사실이 발각이라도 되는 날이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다.
금화가 망설이자, 유신은 그녀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내가 너를 택한 이유가 하나 더 있다. 그건 바로 네 마음속에 자리한 원한이다.”
금화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대장군의 말처럼 그녀의 가슴속에는 분출 직전의 용암처럼 끓고 있는 원한이 있었다. 이를 풀기 위해서 무녀가 되었지만 아무리 옷자락을 휘날리며 하늘을 향해 춤을 춰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런데 유신이 자신의 속내를 들여다보듯 정확하게 짚어 낸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방법도 알고 있을 듯했다.
네 아비는 당항성을 지키던 장수였다. 비록 6두품에 불과했지만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은 어떤 고관대작에 뒤지지 않았다. 네 어미와는 한마을에 살면서 서로 연모하는 사이였다. 그가 당항성으로 떠날 때 너는 어미의 뱃속에 있었다. 두 사람은 당항성에서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면 혼례를 올리기로 약속했다. 네 어미는 정인(情人)이 돌아올 날만 손꼽아 기다리며 나날을 보냈다.”
그 뒤로 안타까운 사연이 이어졌다.
 
산달이 가까워지자 그녀의 배가 눈에 띄게 불러 왔다. 이를 본 아비와 오라비들은 애 아버지가 누군지 밝히라고 닦달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정인이 돌아올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하지만 아이가 나올 때가 다 됐는데도 그에게서는 소식이 없었다. 그러다가 아이가 태어나고 며칠 후에야 비보(悲報)가 전해졌다. 갑자기 쳐들어온 백제군에 의해 당항성이 함락됐고 대항하던 군사들은 전멸했다는 소식이었다. 날짜를 따져 보니 아이가 태어난 그날이었다.
금화의 어미는 살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 하지만 갓 태어난 핏덩이를 두고 정인의 뒤를 따를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모녀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집에서 계속 살 수도 없었다. 그녀는 갓난 딸 금화를 안고 마을을 떠났다. 일단은 정인이 죽은 당항성에 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산후에 몸이 매우 약해진 금화의 어미는 얼마 가지 못해 쓰러졌다. 길바닥에 나뒹군 아이는 사방이 떠나가라 울었다.
이때 이웃 마을에서 굿을 하고 돌아오던 늙은 무녀가 이들 모녀를 발견하고 신당(神堂)으로 데려와 돌봐 주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금화 어미는 무녀에게 자신의 신상을 털어놓았다. 이를 듣고 딱하게 여긴 늙은 무녀는 그녀를 수양딸로 삼고, 무업(巫業)을 가르쳤다. 금화 어미는 차마 호의를 뿌리치지 못했다. 막상 길을 나서 보니 갓난아이를 데리고 당성까지 가는 것이 무리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몇 년 후 늙은 무녀가 죽자 금화 어미는 그 뒤를 이었다.
내 그동안 사람을 풀어 네 어미의 행적을 추적해 봤다. 이제 네가 원망할 상대가 누구인지 알겠느냐?”
유신의 긴 얘기를 듣고 나서야 금화는 가슴속 응어리가 된 울분의 실체를 알게 됐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과 그를 자신에게서 빼앗아 간 백제에 대한 분노였다.
 
금화는 김유신이 파견한 간자에 의해 백제의 좌평 임자에게 보내졌다. 이 당시 임자는 유신에게 이미 포섭된 상태였다. 그는 금화의 미색을 보고 마음이 흔들렸다. 욕심 같아서는 자신이 그녀를 취하고 싶었다. 하지만 대사를 그르칠 수는 없었다.
임자는 기회를 보아 의자왕에게 아뢰었다.
앞날을 내다보는 용한 무녀가 있다 하여 소신이 대령시켜 두었습니다.
의자왕은 폭정으로 날로 흉흉해지는 민심을 달래기 위해서 무녀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사방에 명성이 자자한 무녀가 백제의 앞날이 밝다는 얘기를 해 준다면 백성도 안심할 것이었다.
어서 들이도록 하라.”
금화가 편전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의자왕의 눈이 커지면서 볼에 홍조가 떴다. 그녀는 공손히 절을 올리고 살며시 고개를 들어 국왕을 바라봤다. 의자왕은 이미 초로(初老)에 들어섰지만 여전히 주변을 압도하는 위엄과 서늘한 눈매를 갖고 있었다.
 
금화는 자신의 인생을 망가뜨린 원수와 만나는 장면을 매일 머릿속에 그려 왔다. 상상 속의 백제 왕은 야차처럼 흉포하고 무서운 인상이었다. 그때마다 잘 벼려진 분노의 칼을 그의 가슴에 꽂아 넣고는 했다. 그런데 직접 대면한 원수의 모습은 그녀가 이제껏 그려 온 것과는 달랐다. 기품 있는 눈빛과 아름다운 수염이 눈길을 끄는 얼굴과 당당한 풍채가 어우러져 그녀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의자왕은 금화를 보자마자 한눈에 반했다. 그는 무녀로서가 아니라 여인으로서 그녀를 옆에 두고자 했다. 국왕은 금화를 별궁에서 기거토록 하고 매일 밤 찾아갔다. 이때부터 그의 생활은 그녀를 중심으로 돌아가게 됐다.
의자왕은 국사는 물론 사소한 일을 처리하는 데도 금화의 조언을 받았다. 그만큼 그는 그녀를 믿고 의지했다.
금화의 영향력을 알게 된 주변 사람은 두 가지 부류로 나뉘었다. 하나는 국왕의 실정(失政)을 비판하면서 그 탓을 그녀에게 돌리는 무리로 대부분 귀족이었다. 다른 하나는 그녀에게 잘 보이려고 별궁에 줄은 대는 무리로 국왕의 측근이거나 기회를 잡으려는 사람이었다.
금화는 이들을 적절히 이용하기로 했다. 모든 게 그녀의 탓이라 비난하더라도 결국 그 책임은 의자왕에게 돌아가는 것이었다. 자신에게 아부하는 간신배들이 판을 쳐서 조정이 부패하고 문란해지면 금상첨화가 되는 거였다.
 
모든 일은 계획대로 진행됐다. 의자왕은 폭군이 됐고 민심은 날로 악화되었다. 국왕과 귀족 간의 암투는 파국을 향해 가고 있었다. 백제는 회생 불능의 상태였다. 금화는 맡은 임무를 충실히 해낸 것이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복수의 희열은 느껴지지 않았고 죄책감이 그녀를 괴롭혔다. 처음에는 영문을 몰라 당황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감정의 실체가 분명해졌다. 그건 바로 의자왕에 대한 연모의 정이었다.
달빛이 고고한 밤 금화는 은밀히 궁남지로 나가 임자를 만났다.
이제 그만 멈춰주십시오. 이 나라가 망가지는 모습을 더는 볼 수가 없습니다.”
그녀는 간곡히 애원했다. 백제가 망하면 의자왕도 살 수가 없었다.
임자가 혀를 차며 말했다.
엎질러진 물을 어찌 담으려 하느냐? 이제 누구도 백제의 패망을 막을 수는 없다.”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연못 주변의 버드나무들이 흔들리자, 수면에 뜬 달도 덩달아서 몸을 떨었다. 못 한가운데 있는 정자로 이어진 다리가 유난히 위태롭게 보였다.
 
당 고종의 정비인 왕()는 슬하에 자녀가 없었다. 임금이 후궁인 소숙비(蕭淑妃)를 총애하자 왕후는 위기감을 느꼈다. 그래서 감업사에 있던 무조(武照)라는 여인을 불렀다. 그녀는 원래 태종의 후궁이었지만 그다지 주목받진 못했다. 임금이 승하하자 궁중의 법도대로 절에 들어가 극락왕생을 빌어야 했다.
왕후는 고종이 태자 시절 무조에게 빠졌던 일을 떠올리고, 그녀를 데려와 소숙비를 견제하려 했다. 하지만 이는 늑대를 쫓자고 호랑이를 불러들인 격이었다. 무조에게 마음을 빼앗긴 고종은 왕후마저 폐위하고자 했다.
서력 6559, 고종은 장손무기와 저수량을 불러 왕후를 폐위하고, 그 자리에 무조를 올리겠다고 선언했다. 이를 듣고 저수량이 나서서 간했다.
무씨(武氏)가 선왕을 섬긴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입니다. 어찌 천륜을 어기려 하십니까!”
고종은 이 말을 불쾌히 여기고 저수량을 멀리 담주(潭州) 도독으로 좌천시켰다.
같은 해 10, 고종은 왕씨를 폐하고 무씨를 왕후로 옹립했다. 그리고 이를 기념해 널리 사면령을 내려 죄수들을 풀어 주었다.
왕후 자리에 오른 무후(武后)는 모든 권모술수를 동원해 권력을 잠식해 갔다. 치밀하고 냉철한 그녀의 책략에 놀아난 고종은 차츰 무력해졌다.
무후는 마침내 고명대신 장손무기마저 독주(毒酒)를 내려 죽이고 권력을 독차지했다. 정신이 번쩍 든 고종은 그녀를 막고 싶었지만 이젠 그럴 힘이 없었다.
이럴 때 신라의 사신이 와서 백제를 쳐야 한다고 고종을 부추겼다. 그는 잃어버린 국왕의 권위를 되찾을 기회라 여겼다. 그래서 소정방에게 13만 대군을 주어 백제를 공격하게 했다.
원정군이 출발하기 전날, 고종은 소정방을 따로 불렀다.
짐이 군대를 파견하는 이유를 알고 있소?”
소정방은 임금의 의중을 가늠하고 있었다.
신라, 백제, 고구려, 이 해동 삼국을 평정하지 않고는 천하를 제패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고종은 고개를 끄덕이며 재차 물었다.
저들을 제압하려면 어찌해야겠소?”
소정방이 눈을 가늘게 뜨면서 웃으며 말한다.
저희들끼리 싸우는 틈을 이용해, 우선 신라와 협력해서 백제를 무너뜨리고, 고구려를 멸해야겠지요. 그러고 나서 홀로 남은 신라를 차지하는 겁니다. 그러면 동방은 폐하의 땅이 됩니다.”
맞소. 짐은 평양·사비, 그리고 계림에 도독부를 설치해 직접 통치할 생각이오. 그러기 위해서는 장군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오.”
고종은 흡족한 표정으로 소정방을 격려했다.
이렇게 해서 소정방이 13만 대군을 이끌고 백제로 향하게 됐다.
 
백여 척의 배가 바다를 가르며 섬 그림자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선두로 항해하는 배에서 신라의 깃발이 맹렬히 나부끼고 있었다. 섬에 가까워지자 선단의 중앙에 있는 대장선에서 뿔나팔 소리가 길게 두 번 울렸다. 그러자 배들이 저마다 돛을 걷고 섬을 향해 천천히 접근해 갔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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