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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나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68] 그 겨울의 찻집에서
‘너’와 ‘당신’의 머나먼 거리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4-10 06:30:20
 
 
마음이 끌린다는 게 어떤 건지 처음 알았네. 그렇게 심장이 뛸 수 있다는 거 말이야.”
 
유리창에 비친 주결의 얼굴이 청년처럼 상기되었다가 이내 참담해졌다. 그들이 다시 만난 건 그로부터 7년 뒤였다. 갑순이 일하고 있던 병원으로 새로 부임해 온 심장외과의 최주결은 그사이 군의관을 거쳐 외국 유학을 다녀온 뒤 결혼해서 아이도 둘이나 있을 때였다.
 
누군가를 만나러 오면서 이렇게 가슴 설레 본 지가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소.”
 
당신이 말했습니다.
 
그랬어요?”
 
내가 묻자 당신은 소년처럼 미소 지었습니다. 퇴근하려고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길, 당신이 날 기다리고 서 있었습니다. 당신과 나는 말없이 15분쯤 걸었습니다. 바람은 칼날처럼 시렸고 사람들 속에서 당신과 나의 거리는 가까웠다가 다시 멀어지곤 했습니다. 옷자락이 스치면 우리의 사이는 빠르게 벌어졌다가 더디게 좁아졌습니다. 막다른 골목 끝에 도착했을 때 당신은 잠깐 당황한 것 같았습니다.
 
길을 막아선 건 작은 찻집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장식이 붙어 있는 출입문을 밀고 들어간 건 나였습니다. 문에 매달려 있던 풍경이 바람처럼 흔들렸습니다. 이른 저녁이었고 일곱 개의 테이블은 아직 비어 있었습니다. ‘어서 오세요라는 인사도 없었고 자리를 안내하는 살가움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쇠 방울이 찰랑거리며 공기를 흩어 놓지 않았다면 발조차 밀어 넣을 수 없을 것 같은 견고한 정적이었습니다.
 
오래전 당신은 나를 갑순 씨라고 불렀는데 이제는 당신이 해 봐요.’ 사람들이 있는데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내게 허락을 구하지도 않고 나를 당신이라고 불렀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당신이란 싸우려고 팔 걷어붙이고 상대를 얕잡아 부르는 대명사거나 제3자를 올려 부르는 말이거나 부부간에만 사용할 수 있는 이름이었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당신이라고 불러야 할 어떤 이유도 없었습니다.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당신이라 부르는 것도 듣지 못했습니다. 당신이라는 2인칭 대명사는 낚싯바늘처럼 내 아가미에 걸려 도무지 빠지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나를 라고 했습니다.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로 대신하기도 했습니다. ‘는 나와 동등함을 가장한 비인칭이었습니다. 적어도 남편이 부르는 라는 2인칭 속에는 그리움도, 존중도, 배려도 담겨 있지 않았습니다. 나를 당신이라고 부르며 이야기하는 남자는 주결, 당신이 처음이었습니다. 당신이 나를 당신이라 부를 때마다 나는 존중받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내 심장은 당신에게서 도망친 이후 처음으로 다시 살아 있다고, 살고 싶다고 아우성치고 있었습니다. 외로운 건 내가 누군가의 당신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고, 한 번도 나만의 당신을 가져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주결, 그러니까 당신은 나의 첫 번째 2인칭이었던 것입니다.
 
당신과 나는 하얗게 김이 서린 창가에 앉았습니다. 홀 가운데 연탄을 때는 무쇠 난로가 있었습니다. 은빛 연통이 벽의 구멍을 통해 밖으로 나 있었지요. 난로 위 노란 주전자 목에서 보리차의 하얀 김이 뿜어 나왔습니다. 당신도 나도 섣불리 적막을 깨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고요에 대한 예의라고, 당신과 나는 암묵적으로 합의한 것 같았습니다.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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