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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나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67] 진심을 엿본 그날
말하고 싶지 않은 비밀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4-09 06:30:10
 
 
- 외과 과장님이 수술을 집도하고 인턴과 간호사들이 함께 과정을 참관할 때면 제일 어른이신 박사님이 어려운 질문들을 창날처럼 던지곤 했습니다. 인턴 중 누구라도 대답을 못 하면 이런 멍청한 놈, 그동안 뭘 배웠어?’ 하고 톡톡히 망신을 주었지요. 그때마다 당신만은 한 번도 틀리지 않고 청산유수처럼 대답했습니다. 박사님조차 감탄하며 다른 의사들을 향해 주결이 좀 본받아라하실 정도였지요.
 
친절하고 명석한 당신은 간호사들에게 최고로 인기 많은 의사였습니다. 그런 당신이 오늘 힘드셨죠?’ 지금 퇴근하세요?’ 열심히 하세요, 저 먼저 갑니다, 내일 봬요’ 하고 사소한 말을 건네 주는 날이면 하루 종일 행복해서 얼마나 가슴이 뛰었는지 모릅니다.
 
처음으로 다리 절단 수술을 참관하던 날이었습니다. 그때는 장비가 발달하기 전이어서 정형외과 선생님이 환자의 허벅지를 톱질했습니다. 그런데 거의 다 잘린 다리가 허술하게 붙잡고 있던 간호사의 손에서 튕겨져 그만 내 눈앞으로 날아갔습니다. 수술 상황을 가까스로 견디고 있던 나는 기겁해서는 그만 정신 줄을 놓고 말았지요.
 
그때 재빨리 달려와 나를 안아 일으킨 건 당신이었습니다. 물을 가져오라고 소리치고 나를 안아 올려 옆 침대에 눕혔어요. ‘나도 기절이나 할 것을.’ 옥순이 부러워하며 나중에 말해 주어 알았습니다. 하지만 가물가물, 겨우 눈을 뜨자마자 옆 침대에 다리가 잘린 채 누워 있는 환자를 보고 나는 또다시 비명을 지르며 기절하고 말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는, 철없던 병아리 간호사 시절의 추억입니다. 간호사와 인턴이 짝을 맞춰 포도밭으로 피크닉을 간 날을 기억하세요? 당신이 나와 함께하려고 애써 만든 자리라는 걸 그땐 몰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당신이 내게 누님을 만나 달라고 하셨지요. 무척 멋진 분인데 내 이야길 했더니 한번 만나 보고 싶다 하셨다면서 이야기가 잘 통할 거라고, 혼자가 불편하면 친구랑 함께 오라고 당신이 초대했습니다. 서울에 그렇게 큰 집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마치 오래전, 할아버지와 함께 살던 시절의 우리 집 같았습니다. 일하는 사람이 안내를 해 주어 들어갔는데 솟을대문을 두 개나 지나서야 당신이 거처하는 별채에 다다를 수 있었지요. 그런데 마침 당신 아버님과 딱 마주치고 말았습니다. 아무 말씀 없이 나를 슬쩍 쳐다보기만 하셨는데 무척 엄격한 분이라는 걸 알 수 있었지요.
 
잠시 후 일하는 분이 와서 아버님이 부르신다며 당신을 데려갔습니다. 그때 과일과 식혜를 내온 아주머니께 누님은 어디 계시냐고 물었더니 지금은 외출하고 안 계신다고 했습니다. “도련님께서 아가씨들을 집에 들이시고 별일이네. 주인 어르신께서 아시면 사달이 날 텐데.” 아주머니가 혼잣말처럼 궁싯거리며 나가더군요.
 
나에 대한 당신의 특별한 마음을 본 것 같았습니다. 너무 행복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지만 나는 같이 갔던 옥순을 일으켜 세워 도망치듯 당신의 집을 나오고 말았습니다. 너무 엄청난 집안, 엄한 아버지, 의사와 간호사. 나는 감히 당신과의 미래를 꿀꿀 수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내겐 법적으로나마 남편이 있었으니까요. 그 말은 죽어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왜 그냥 갔느냐고, 당신이 다음 날 물었지만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그날 이후 나는 당신을 피해 다녔습니다. 그즈음 시어머님이 중풍으로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았고 그분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몇 달, 나는 병원 일을 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계신 그 병원으로는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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