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 연재소설
김규나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66] 마음도 식물과 똑같다
오랜만에 불러 보는 이름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4-08 06:30:10
 
 
지하철 기관석에 앉아 터널 안을 달릴 때 나와 어둠 사이에 있는 유리창은 거울보다 더 적나라하게 내 모습을 비추었다. 귀를 찢을 것 같은 터널 안의 소음 속에서 나를 바라보는 유일한 시선, 무표정을 가장하고 있지만 신경을 바짝 곤두세운 또 다른 내가 그곳에 있었다.
 
나는 근심스럽게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나를 향해 달렸다. 웃지 않는 나. 입을 꾹 다문 나. 손 뻗어도 만질 수 없는 나. 승강장의 불빛이 보이고 마침내 그 밝음의 한가운데 서는 순간 또 사라져 버리는 나. 빛의 반사가 그려내는 나는, 아무리 달려도 닿을 수 없었다. 내가 닿을 수 없는 것, 그중에서도 가장 멀리 있는 것, 그것이 나였다.
 
밤이 깊어질수록 바람이 거세졌다. 파도 소리도 점점 크고 높이 치솟았다. 그러나 내 눈에는 바람도 파도도 휘몰아치고 있는 눈송이도 보이지 않았다. 유리창에 반사된 풍경은 벽난로  안에서 타오르고 있는 벌건 불꽃과 거실의 정적이었다. 해적 안대도 없이 앞머리로 한쪽 눈을 가린 내 옆얼굴과 입을 꼭 다문 정하운의 뒷모습이었다. 그 모두를 반사하고 있는 거실의 유리창 앞에 최주결 박사는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자신을 마주하고 있었지만 그가 바라보고 있는 건 유리창에 선명히 반사된 여든이 넘은 노인이 아니었다. 오래전 한 여자를 사랑했던 젊은 날의 주결, 아득히 먼 시절의 청년이었다.
 
아픔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현실에 만족하는 사람도 없지. 그러나 쾌활하고 귀여운 아가씨였어, 갑순은. 그래, 갑순. 참 오랜만에 소리 내어 불러 보는 이름이군.”
 
회한에 젖은 최주결의 얼굴이 유리창에 비쳤다. 갑순? 노트 속 이름을 떠올렸다. 나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크게 뜨고 앞에 앉아 있던 정하운을 쳐다보았다. ‘기다려요!’ 하는 눈빛으로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마음도 식물하고 똑같아. 따듯하고 환한 사람을 바라게 되지.”
 
깊은 잠에서 깨어난 듯,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소리 내어 발음하자 그는 오래 가둬 두었던 가슴속 이야기를 터뜨리고 싶은 열망을 더는 참을 수 없는 것 같았다.
 
내겐 아내가 있었지만, 그래, 아내가 있었네. 부모님이 정해 주면 결혼하고 아이 낳고 그렇게 살았어. 자네들은 상상도 못 하겠지만 오륙십 년 전이었으니까 부모님 뜻을 거역하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지.”
 
최 박사는 애써 자신을 변명했다. 흔하디 흔한 불륜으로 시작된 관계인가? 그 순간 섣불리 오해했지만 그들이 처음 만난 건 그가 결혼하기 훨씬 전이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노트를 읽고 알았다. 에바는 그 시절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었다.
 
- 당신을 처음 만난 건 내가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도립병원에서 일할 때였습니다. 간호사하고는 말도 섞지 않는 의사 선생님들도 있었지만 내가 환자를 소독할 때나 수술실에서 기구들을 준비할 때 인턴이던 당신은 친절하게 먼저 말을 걸어 주곤 했습니다. 우연히 마주치면 뛰어와서 산더미 같은 진료 파일을 나누어 들어 주었고, 허드렛일도 스스럼없이 도와주는 분이었지요.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추천해요
22
좋아요
19
감동이에요
4
화나요
0
슬퍼요
0
오늘자 스카이데일리
주요 섹션 기사
주소 : 서울특별시 중구 새문안로 26 청양빌딩 7층 | 전화 : 02-522-6595~6 | 팩스 : 02-522-6597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시 아01703, 등록일 : 2011년 7월 18일, 발행·편집인: 조정진, 편집국장: 고동석
copyrightⓒ2011, All rights reserved. Contact : skyedaily@skyedaily.com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박선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