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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나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62] 정하운이 자네를 보낸 이유
죽음의 세계에 제 발로 걸어 들어왔군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4-02 06:30:10
 
 
나는 스탠드를 끄고 방을 나왔다. 계단 난간에 서서 아래층을 내려다보았다. 불이 꺼진 실내는 어두웠다. 다만 계단 아래쪽에서 새어 나온 희미한 빛이 더듬더듬 계단을 거슬러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계단을 밟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거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고풍스러운 다이얼 전화기에서 울리던 벨 소리가 멈췄다. 나도 걸음을 멈추었다. 냉기가 흐르는 실내는 모든 게 죽은 듯 적막했다. 괘종시계의 시계추 흔들리는 소리가 밤의 정적을 마디마디 잘라 놓았다. 그제야 2층으로 올라갈 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이 보였다. 그 끝에서 희미한 빛과 함께 조근조근, 내용을 알 수 없는 음성이 들려왔다.
 
또다시 내 손으로 죽여야 한단 말이냐?”
 
지하실 계단 끝에 다다랐을 때 문 안쪽에서 버럭, 노인이 소리쳤다. 전화기를 탕 하고 내려놓는 소리는 노엽고도 고집스러웠다. 누구를 죽인다는 것인가? 나는 숨을 멈췄다.
 
계단 끝의 닫혀 있는 출입문의 손잡이를 돌리는 내 손이 푸르르 떨렸다. 알코올과 뒤섞인 역겨운 냄새가 훅, 코를 덮쳤다. 차가운 냉기가 목덜미로 달려들었다. 발에 못이라도 박힌 듯 나는 눈을 굴려 방을 빙그르르 둘러보았다. 한쪽 벽을 가득 채운 책장과 그 앞에 읽다 만 책들이 펼쳐진 책상 위에는 초록색 갓을 쓴 독서 등이 켜져 있었다.
 
맞은편에는 화학 약품이 든 용기와 플라스크와 집기병, 샬레와 메스 실린더 같은 실험 도구들이 넓은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방 한가운데, 전기선이 이어진 의료기기들과 스테인리스 이동식 테이블이 놓여 있는 게 보였다. 낯설고도 기이한 풍경 끝에 메스를 든 노인이 서 있었다.
 
그의 뒤에 있는, 칸칸이 수납할 수 있는 일정 크기의 냉동고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가지런히 정돈된 메스와 가위와 거즈들, 그리고 온갖 종류의 약품과 도구들이 가지런히 정렬해 있는 그곳은 수술실, 아니 부검실이었다.
 
어머니 말고는 죽은 사람을 본 적 없지만 노인이 마주하고 있는 테이블, 그 위에 누워 있는 것이 시체인 것을 나는 단번에 알아보았다. 유난히 희고 큰, 그러나 피가 돌지 않아 검푸르게 식어 버린 피부와 붉은색 머리카락은 얼핏 보아도 서양인 같아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는 했다. 하지만 정작 나를 얼어붙게 한 건 노인의 엄중한 눈빛이었다. 못마땅하다는 듯 입을 꽉 다물어서 더 완고해진 그의 턱이었다. 감히 다가설 수 없는, 시신보다 더 낯설고 냉혹한 시선이 나를 쏘아보았다. 그의 한마디는 나를 더욱 얼어붙게 했다.
 
죽음의 세계에 제 발로 걸어 들어왔군.”
 
내가 자신의 세계를 침범했다는 사실이 불쾌한 것 같았다.
 
자네와 똑같은 증상을 앓았던 사람이라네.”
 
최 박사는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이번에도 에두르지 않고 불쑥 말해 주었다.
 
정하운이 자네를 이곳에 보낸 이유가 궁금하다고 했나?”
 
시신에서 검붉은 무언가를 들어 올려 보여 주며 그가 물었다. 가시가 숭숭 돋친, 검게 변색된 안구였다.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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