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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나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61] 사람의 온기가 사라진 방
미래를 바라보는 과거의 눈동자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4-01 06:30:10
 
 
나는 에바의 문장 중 아이의 작고 보드랍던 발가락에 밑줄이라도 긋듯 글자들을 쓰다듬었다. 내 기억 속 어머니의 창백한 발을 밀어낸 건 첫아이 건이었다. 갓 태어난 아이의 꼼지락거리는 열 개의 발가락, 작고 하얗고 보드라운 발가락, 투명하고 여리던 발톱. 단내가 나는 아이를 안거나 만질 때면 나는 아이의 발가락에 입을 맞추었다. 그런 나를 보며 아내는 무척 뿌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행복하던 시절,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날들이었다.
 
나는 에바의 글을 몇 페이지 더 읽다가 코트를 걸치고 불을 끈 뒤 방을 나왔다. 달빛이 없어 어둡겠지만 랜턴이라도 찾아 해안으로 내려가 볼 생각이었다. 걸음을 디딜 때마다 마룻바닥이 신음하듯 소리를 냈다. 아무리 조심해도 나무 바닥은 삐거덕거렸다. 내가 2층으로 올라올 때 켜져 있었던 거실 전등과 벽난로의 불길은 최 박사가 모두 끈 모양이었다.
 
어둠을 더듬어 계단을 내려가려던 나는 이상한 느낌에 돌아섰다. 2층 첫 번째 방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최 박사가 올라온 것인가? 내가 잠든 사이 누군가 산장에 온 것일까? 나는 낮게 문을 두드려 보았지만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허락되지 않은 곳에 들어가는 건 무례한 일이었다. 그러나 호기심을 누르지 않고 손잡이를 돌려 방문을 열었다.
 
더블 사이즈의 침대는 오래전 유행했을 법한 흰색 공단으로 만든 프릴 장식의 커버로 깔끔하게 덮여 있었다. 흰색의 화장대와 거울, 옷장과 장식장 역시 세월의 더께에 가려 있었지만 섬세한 곡선과 결이 고운 재질은 조금도 손상되지 않았다. 벽난로에는 근래에 불을 피운 흔적은 없었다. 사람의 온기가 식은 지 오래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화병에 꽂힌 흰색 장미들은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지, 누렇게 말라 금방이라도 바스러져 먼지로 사라질 것만 같았다. 나는 화장대 옆에 서 있는 스탠드로 다가가 전구 가까이 손을 대보았다. 하루 종일 켜 놓았던 것처럼 뜨거웠다. 정확히 설명할 수 없지만 아름다우면서도 기괴하고 다정하면서도 싸늘한 기분이 드는 방이었다.
 
내 시선을 붙잡은 건 화장대 위에 세워 놓은 작은 액자였다. 미소 짓고 있는 여자는 정하운이 아닐까, 착각할 만큼 미인이었고 나이도 비슷해 보였다. 빛이 바랜 것으로 보아 수십 년 전 사진이 분명했다. 풍성하게 부풀린 헤어 스타일과 차이나 칼라가 달린 원피스 정장으로 한껏 맵시를 내고 사진관에서 찍었을 것이다. 갸름한 얼굴에 의지가 강해 보이는 광대뼈, 마르고 곧은 콧등이 지적이면서도 단호한 인상을 주었다. 반면 단정한 이마와 도톰한 아랫입술은 여성적인 매력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이 집에 안주인이 없다는 것, 부부 침실로 보이는 방, 복도의 십자수 액자…, 최 박사의 아내구나, 나는 단정했다.
 
나는 액자를 집어 들고 사진을 마주 바라보았다. 크지는 않았지만 깊고 또렷한 눈매로 카메라를 똑바로 마주했을 시선은 시간을 뛰어넘어 나를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를 투과해 더 멀리 응시하는 눈이었다. 아름다운 미소였지만 여기가 아닌, 너무 먼 곳을 바라보는 시선이 보는 사람을 쓸쓸한 기분에 젖게 했다. 나는 액자를 내려놓고 여자의 시선이 향하는 더 먼 곳을 확인하려는 듯 뒤를 돌아보았다.
 
그때 텔레비전 시대극에서나 나올 법한 유선전화의 벨 소리가 들렸다.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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