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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나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60] 같은 세상에서 다른 시간을 살아온 당신과 나
마침내 하나의 시간을 소유하게 되었지만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3-29 06:30:10
 
 
당신은 거북이 같았을 거야.”
 
내가 말하자 자신이 그렇게 못생겼느냐면서 아내는 입술을 쀼루퉁하게 내밀었다.
 
거북인 귀한 동물이야. 난 거북이를 바다의 낙타나 바다의 코알라라고 부르겠어. 착하고 귀엽고 사랑스럽지.”
 
내 말을 듣고서야 마음에 든다는 듯 아내가 방긋 웃었다.
 
아무튼 난 최고 기록이 13초였거든.”
 
아내가 우와, 하고 감탄해 주었다.
 
우리가 같은 100m를 달려왔다고 해도 내가 이미 완주해서 물을 마시고 있는 동안 당신은 60m 지점의 어딘가를 스쳐 지나고 있었을 거야. 내가 운동화 끈을 풀고 그늘을 찾아 바람을 느끼는 동안 당신은, 이 길이 왜 이렇게 멀까 생각하며 목이 말랐겠지. 당신은 먼저 도착한 친구들을 보며 왜 더 빨리 달릴 수 없을까, 화가 났을지도 모르겠네. 그런데 말이야, 나는 친구들 중에서 최고로 빠르진 않았지만 우사인 볼트나 칼 루이스만큼 더 빨리 달리길 희망하진 않았어. 나는 너무 빨리 달리고 싶진 않아. 속도가 빠르면 그만큼 목적지에 일찍 도착하니까.”
 
빨리 도착해서 더 멀리 가면 좋지 않아?”
 
아내가 말했다. 내가 고개를 저었다.
 
빨리 달리는 사람들이 다음에 할 일은 또 달리는 거야. 달리고 또 달리지. 더 빨리 달리고 싶은 욕망만 남아. 만약에 내가 너무 빨리 달렸다면, 스쳐 지나가면서도 나는 당신을 알아보지 못했을 거야.”
 
아내는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비로소 이해하고 머리를 끄덕였다.
 
우린 같은 세상에서 있었지만 전혀 다른 시간을 살아왔어. 그리고 마침내 당신과 내가 하나의 시간을 소유하게 된 거야.”
 
아내의 얼굴이 꽃처럼 피었다. 우리는 잔을 부딪쳐 달콤하게 다시 건배했다. 하지만 우리의 시간은 그때부터 어긋났을지도 몰랐다. 그로부터 5, 아내와 헤어졌고 지금 나는 죽음의 공포조차 혼자 견디고 있었다. 나는 아내의 눈빛을 털어 내려고 에바의 노트로 다시 시선을 내렸다. 내가 잃어버린 시간이 마치 에바의 노트 안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서둘러 페이지를 넘겼다.
 
- 11월 유리창에 부서진 빗방울처럼, 나의 언어는 매일 조금씩 희미해졌습니다. 새벽은 쉬이 오지 않았고 모국어가 사라진 세상은 적막했습니다. 몰락이거나 추락이라고 명명할 수도 있을 슬픔이었습니다. 흐릿한 별빛과 반쪽만 남은 달이 사라져 가는 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었습니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으나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나의 말과 목소리가 사라진 비스바덴에서도 사람들은 걷고 말하고 마시고 웃었습니다세상은 숨바꼭질하다 옷장 안에서 잠든 아이처럼 태평했으나 해가 지고 어둠 속에서 혼자 눈 뜬 아이처럼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직박구리는 날지 않았고 수양버들은 물그림자를 띄우지 못했으며 나는 잠들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새벽, 달아났던 문장들이 내 귀에 대고 속삭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고양이를 쓰다듬지 않아. 바닷속에는 오직 헤엄치는 참새들뿐이지. 귀뚜라미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눈물 나게 매운 양파란다.’ 불면의 밤이면 그리운 모국어가 바다 비린내 나는 손으로 내 마른 머릿결을 쓰다듬었습니다. 그런 날은 함께 있어 주지 못했던 내 아이의 작고 보드랍던 발가락과 서럽기만 했던 생의 한 시절, 그리고 언제나 기다리는 당신의 뜨거운 눈빛과 붉은 입술이 그립기도 했습니다.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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