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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나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57] 우리가 살았던 시간은 어디로 갔을까
미래에서 온 사람, 과거에서 온 사람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3-26 06:30:20
 
 
- 나는 울지 않았습니다. 할아버지와 어머니, 범이 할아범과 언니들 그리고 잠깐 품에 안아 보았던 내 아이. 그리고 당신. 나는 내가 살았던 시간을 떠나기 위해 떠나고 있었습니다. 당신에게 달려갈 수 없도록 나를 가두기 위해, 내게 달려올 수 없도록 당신을 추방하기 위해 나는 떠났습니다.
 
나는 굳게 닫혀 있던 창문 셔터를 밀어 올렸습니다. 서울에서라면 새벽일 테지만 창밖엔 화살처럼 쏟아지는 햇빛이 환했습니다. 눈부신 구름, 그 위로 뿌연 광선이 그어 놓은 얇은 띠, 다시 그 위로 높게 펼쳐진 대기는 짙은 코발트색으로 번져 있었습니다.
 
발 아래 지천으로 피어 오르던 구름은 김포공항에서 그랬던 것처럼, 지상으로 비를 쏟아붓고 있을지도 몰랐습니다. 비를 피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구름 위에 올라서는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비로소 깨닫고 있었습니다.
 
해외여행이나 출장이 당연한 지금의 정서와는 다른 에바의 글을 읽으며 나는 신혼여행을 떠나던 비행기 안에서 아내와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났다. 아내는 예물로 주고받은 시계를 손목에서 풀어 바늘을 아홉 바퀴 뒤로 돌리고 나서 내게 물었다.
 
아홉 시간째 비행하고 있지만 시계상으로는 제로야. 생각해 봐. 이륙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시간을 거슬렀고 출발했던 그 시간에 도착한 거지. 우리가 지나온 시간은 다 어디로 사라진 걸까?”
 
당신은 우리가 타임머신을 타고 있다는 걸 모르는구나. 히드로 공항에 내리는 순간 우리는 미래에서 온 사람이 되는 거야. 며칠 머무르다가 서울로 돌아가게 되면 그땐 과거에서 온 사람이 되겠지만.”
 
나는 웃지도 않고 오른쪽 왼쪽으로 손을 움직여 방향을 가리켰다. 런던은 오른쪽, 서울은 왼쪽, 미래는 오른쪽, 과거는 왼쪽이었다. 아내도 사뭇 진지하게 내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은 언제나 떠나고 싶어 하지. 이곳을 떠나 저곳으로, 그곳을 떠나 또 다른 곳으로. 인류가 정착 생활을 시작한 건 고작 1만 년 전이니까. 아마도 유랑의 습성이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제 우리도 현재를 잃어버린 시간의 유목민이 되는 거야.”
 
현재를 왜 잃어버려?”
 
아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마차나 기차나 배로 이동할 때는 시간을 잃어버리지 않았어. 몸으로 고스란히 시간을 체감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비행기 덕분에 멀리, 빠르게 여행하게 되면서 시간에 구멍이 생긴 거야. 런던으로 가는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는 서른두 시간이지만 돌아가는 날엔 열여섯 시간뿐일 테니까. 그러니 생각해 봐. 만약 우리가 계속해서 서쪽으로 여행하거나 동쪽으로만 계속 날아간다면, 그러다 어느 지점에서 문득 멈춘다면 어떻게 될까. 너무 많은 시간에 짓눌리거나 너무 많은 시간을 잃어버리겠지. 그렇게 시간을 놓치면 제자리로 돌아온다고 해도 다시는 돌이킬 수 없어. 사랑하던 연인들조차 한번 어긋나면 서로 다른 시간을 살게 되는 거야. 두 사람 사이에 시차가 생기거든. 낮과 밤이 서로 만날 수 없듯 서로의 세계가 어긋나는 거지.”
 
같은 곳을 같은 시간 동안 여행한 연인은 상관없겠지?”
 
아내가 장난스럽게 그러나 조금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내게 물었다.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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